저는 지금 어떤 그림을 보러 여기에 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함께 세계 3대 성화로 꼽히는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입니다. 우아한 대성당 뒤의 작고 아담한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오른쪽 벽면에 작품 딱 한 점 걸려 있습니다. 16세기 이래 그림 한 점의 미술관. 입장료는 2.8유로(약 3600원). 그래도 사람들로 늘 붐빕니다. 명작 예술품과 거기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성당의 큰 재원이 된 거죠.
1588년에 완성된 그림은 장례식 당시의 이적을 묘사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건 장례의 장중한 분위기를 흔드는 그림 속 꼬마아이의 시선 처리입니다. 좌측 하단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중앙 하단에 자리한 백작의 시신을 응시하지 않고 정면의 감상자를 바라봅니다. 손가락은 백작을 가리키면서요. 그림 밖 관람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습니다. 소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감상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지금 백작님의 영혼은 천국에서 예수님의 심판을 받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고 계십니다.’
이런 기법은 <천지창조>나 <최후의 만찬>이 보여주는 엄숙함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림 속에 묘사된 주인공은 그림 아래 석관에 잠들어 있고, 그림을 그린 그레코와 그의 어린 아들은 그림 속에 들어가서 16세기 이래 500년 간 살고 있습니다. 그레코의 어린 아들이 바로 관객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소년입니다. 그림 속 수많은 인물 중 그레코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감상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어린 아들의 희생까지 감내하는 비정한 부정(父情) 때문인지 프랑코 군대는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낸 뒤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러고는 이 공간을 성역화 하는 데 주력해서 오늘에 이릅니다. 모스카르도 대령은 조국을 위해 어린 아들까지 희생한 위인으로 포장됩니다만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프랑코 군인들이 벌인 무수한 살인 만행을 덮는 수단으로 루이스 이야기를 활용했다는 겁니다. 한 소년의 죽음을 두고도 진실은 가려집니다. 600년 전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그림 속 아들’과 ‘전화기 속 아들’은 인간 본성의 성스러움과 광기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돌아 나오는 길 광장 입구에서 세르반테스 동상을 만납니다. <돈키호테> 출간 400년을 기념하는 동상이군요. 다가가서 책 위에 손을 얹어 봅니다. 성스러움, 비정함, 순정, 광기. 인간 내면의 파란만장한 감정들이, 14세기의 성스러운 죽음과 20세기의 광기 어린 죽음이 뒤엉켜 밀려옵니다. 이율배반의 역설.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만든 <맨 오브 라만차>(1965)의 명곡 <이룰 수 없는 꿈>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더니 몸이 점점 뜨거워집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이상을 향한 무모한 도전. 그래도 인간만이 그 길을 간다는 숭고한 ‘인간 독립 선언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독립하나요?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는 것. 인간이 꾸는 꿈의 정의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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