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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계상정거도/박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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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주인은 갑자기 길 떠났나 보다
밤새 근육통을 앓은 날씨
먹다 남은 두부가 식탁에 놓여 있다
이황이 머물던 진경산수를 헐값에 장만했다더니
주인은 천 원 속 암자까지 신발도 없이 걸어갔을 것이다
빈센트의 구두 한 켤레 문 앞에 그대로 있다

이 집 주인은 새벽에 폐지를 줍는 사람
손수레 가득 상자들의 자리싸움
사발면 위에 초코파이까지 얹으면 천 원이 석 장
언제 저리 관직 마다한 귀한 소나무 심고
물고기 뛰노는 전원주택 지었을까
식탁에 놓여 있는 정원 한 장은 낙화의 시간을 지나왔다
폐품 넘쳐흐르는 밤의 강가에서
나룻배 가득 지폐 석 장 싣고 당도한 곳은 먹빛 바랜 집
창문에 방충망 걸어 놓은 거미가 밤새 먼지 세는 곳
나는 주인이 미처 끄지 못한 변방의 촛불을 읽는다
상한 두부는 그 자리에 두어도 좋다고 적혀 있다

주인은 풍경화의 소실점 되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
꼬깃꼬깃 구겨진 구름 한 점과
허공의 소유권 다투고 있을지도 모를 일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천 원권 뒷면에 인쇄되어 있다. 그곳이 도산서당인지 혹은 다른 어느 곳인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구불구불 흐르는 강역에 소연히 얹힌 서당에 앉아 글을 읽고 있는 분은 퇴계 이황 선생임에 분명하다. 아쉽게도 나는 <계상정거도>의 원본을 아직까지 접해 보지 못한 터라 그림에 대해 별달리 말할 형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 지갑에서 꺼내 한참을 들여다본 낡고 때 묻은 천 원권에 옮겨진 <계상정거도>는 몇 마디 말로는 옮길 수 없을 만큼 애잔하고 소슬하고 슬프고 그런 한편으로 청신했다. 모두 이 시 때문이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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