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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수치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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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을의 빛과 소리가 정겹다. 이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과 한가위를 지나 가을 단풍이 진하게 물들어 가는 계절의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저렇게 익어 가는 가을을 호흡하면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산책길에 접어든다. 이미 앞서 걷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온다. 공복 혈당 수치, 당화혈색소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 혈압 수치 이야기다. 다시 집에 돌아와 조간신문을 펼친다. 지면은 주가지수, 종합부동산세율, 고용률, 실업률, 소득지표, 환율, 대통령 지지율, 출산율 및 각종 통계 수치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우리네 일상에서 기온, 시간, 전화번호, 계좌번호, 비밀번호, 사번, 번호키 등도 각종 수치로 표기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디지털화된 일상은 온갖 수치의 세계로 환원된다. 이제 일상에서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내 평가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생활 도구로 조약돌, 나뭇가지, 동물 뼈의 새김 눈을 사용해 수를 대신하며 살아왔다. 언제 어디서나 수는 인류의 '보편적 언어'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삶의 외적이고 정량적(定量的)인 차원은 수치로 나타내 그것을 합리적인 분석, 평가, 예측을 위한 자료로 활용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근자에 '코드 통계' 및 통계 수치 '코드 해석'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는 통계 작성 주체의 정치적 신념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팩트와 무관한 통계 표본과 편향된 통계 수치가 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가 통계는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로 정확한 조사만큼이나 객관적인 분석이 중요시된다. 정권 입맛에 맞는 '맞춤형' 통계 해석은 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거니와 정치 논리가 중립성과 독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국가 통계 정책을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문제가 많아 없어져야 할 통계가 정치 논리 탓에 억지로 되살아나서는 안 된다.
한편 수는 자연을 구성하는 원리다. 질서와 조화의 학문인 수학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하는 '보편적 언어'로 존중돼야 한다. 서구에서는 근대 초기부터 '자연의 수학화'에 몰두했고, 자연은 수학적 등식으로 남김없이 포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은 '수학의 언어'로 기록돼 있다고 확언했다. 다른 한편 수학도 인간의 작품으로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몸과 두뇌와 나날이 살아가는 일상의 경험 속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세기 말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함으로써 수학이 단일한 체계가 아님이 증명됐다. 20세기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발표되면서 수학이 완전한 체계가 아님도 증명됐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무턱대고 믿는 '수치의 신화'의 민낯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수치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신화적 사고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내면적인 정성적 차원이나 비인지적 차원에 해당하는 부분까지도 양화하고자 하는 '수치 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의료적인 건강지수가 정상 수치라도 아픈 사람이 있고, 비정상 수치라도 건강하고 활력 있게 사는 사람이 있다. 비록 행복지수, 도덕성 지수, 사랑의 온도 등도 수치로 나타내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그것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위험하거나 진실을 호도할 수도 있다. 정녕 고귀하고 내밀한 것들, 예를 들면 신앙심, 신념, 인품, 마음씨, 사랑, 우정, 공감력, 희망, 행복 등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따라서 일상을 지배하는 수치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치에 대한 과신과 불신 사이의 적정한 지점에 서고자 하는 실천적 지혜와 지적인 분별력이 요청된다.

강학순 안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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