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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산타페, 로마,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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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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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가 있었다. 해질녘 근처 피자하우스에 들러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손과 접시, 테이블과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듯한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켰던 내 마음속의 소용돌이가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그럴 것이다. 깨달음이란 그토록 별안간에 닥치는 일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한번은 이토록 놀랍고도 결연한 깨달음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하루키는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썼다. 때로 깨달음은 깊숙한 슬픔이기도 하니까. 그의 말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루키가 이 글을 쓸 때 자신의 기억을 되살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맥주와 피자를 앞에 놓고 산타페의 석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드는, 붉은빛이 시각(視覺)을 지배하는 그 시간에.
2015년 9월. 나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바이마르의 괴테라도 된 기분으로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9월 10일 저녁이었다. 나는 피우지라는, 오래된 온천이 있는 작은 도시에 숙소를 예약했다. 로마의 남동쪽,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나오는 한적한 곳이다.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치기 때문에, 로마와 피우지를 잇는 왕복 4차선 도로 가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빵을 먹었다. 포도주 잔을 비운 다음 식당을 떠나려던 나는 아마도 내 생애에 다시는 보지 못할 엄청난 석양과 마주쳤다.

이때 찍은 사진은 '인생샷'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최고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황홀한 그 빛깔에 넋을 빼앗겨 노을이 어둠에 젖기 시작할 때에야 렌즈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글거리는 석양을 배경으로 우산을 펼친 듯한 모양으로 가지를 다듬은 소나무, 이제 막 전조등에 불을 밝힌 채 로마를 빠져나오는 장난감처럼 작은 피아트들이 번져 나가려는 나의 기억에 정착액(Fixative)을 뿌린 듯 선명한 이미지로 남았다. 그러나 사진은 내 기억만큼 강렬하지 않다. 나에게 렌즈를 다루는 기술이 더 있었다면!

내 사진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늦은 여름 로마에서 피우지로 가는 길가에서, 막 달아오르는 포도주의 취기를 느끼며 바라본 그 석양의 강렬한 충격과 충동을 결코 재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눈은 구조가 카메라와 흡사하다고 한다. 렌즈를 통과한 빛이 필름에 상을 맺듯 각막과 수정체를 통과한 빛이 망막에 도달해 형체와 색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 카메라가 인간의 눈을 대신할 수 없다. 프로 사진가들도 석양을 찍으려면 여러 가지 이론에 경험을 보태야 좋은 사진을 얻는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거기다 심안(心眼)의 도움까지 받는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 한다. 또한 마음에 이르는 통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즐겨 눈을 마주치며 사무치게 감동하지 않던가. 그 이야기를 하겠다.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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