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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영의 무대읽기]천재작가의 사랑은, 기억되기에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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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4개월만에 돌아온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

포의 아내 버지니아(김사라·중앙). [사진=쇼미디어그룹]

포의 아내 버지니아(김사라·중앙). [사진=쇼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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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아무 생각이 없었네

(중략)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 '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경주 옮김

천재의 사랑은 쉽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비범한 재능 때문이다. 항상 주목받지만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애너벨 리'에서는 한없는 사랑이 느껴진다. 시만 읽으면 평생 행복했을 것 같다. 사실 이 시는 20대에 요절한 아내에게 바치는 추모시다. 천재의 아내는 매서운 추위 속에 담요도 없이 짚을 깐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시인은 깨달았을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아내의 무덤가를 배회하다 정신을 놓고 울었다 한다. 마치 운명인 듯, 이 시는 시인이 죽은 지 이틀 뒤 발표됐다. 시인의 이름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탁월한 소설가이기도 한 포는 애너벨 리에 아내 버지니아 클렘을 향한 마음을 담았다. '어셔가의 몰락'(1839), '모르그가의 살인사건'(1841) 등 스릴러, 추리, 공포 장르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포는 알았을까. 자신의 힘겨웠던 사랑이 200여년 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날 지.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가 2016년 한국 초연 이후 1년4개월 만에 돌아왔다. 재연이 된다는 건 그만큼 그의 드라마틱한 삶에 관객들의 공감이 컸다는 뜻이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타인의 비극을 보면서 슬픔을 넘어 현실의 한 가닥 희망을 찾고자 한다. 연출가 노우성은 "어둡고 슬픈 이 뮤지컬을 관객들이 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실존 인물인 에드거 앨런 포의 삶 자체가 힘들었다"면서 "천재의 삶은 시시포스처럼 운명의 고통 속에 있었지만 헤라클레스처럼 죽어서는 신이 되는, 작품을 통해 영원히 기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곡인 '영원'을 부르기 위해 2시간20분이 흘러간다"고 덧붙였다.
포(정동하·왼쪽)와 버지니아(김사라). [사진=쇼미디어그룹]

포(정동하·왼쪽)와 버지니아(김사라). [사진=쇼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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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제 불쌍한 영혼을 거둬 주소서" 무대 위에서 주인공 포(정동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말투, 당시 문단을 이끌어 간 작가 그리스월드에게도 밀리지 않는 입담을 과시한다. 여러 등장인물과 무대, 음악 등 뮤지컬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한 사람에 집중됐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어두운 배경에서 포는 홀로 자주색의 외투를 입고 있다. 자주색은 우울증이나 저혈압 등을 상징하며 신비롭고,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주인공을 질투하며 파멸로 이끄는 라이벌 작가 그리스월드를 비롯해 앙상블(코러스 배우) 등은 검은색의 의상에 심지어 분장도 어둡다. 연출가는 "원래 주인공을 빼고 나머지 모든 등장인물을 (배경처럼) 소품의 역할로 제한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쇼미디어그룹]

[사진=쇼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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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연을 보면서 버지니아(김사라)에 주목했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흰색 위주의 밝은 옷을 입었다. 버지니아 없는 포는 상상하기 어렵다. 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첫사랑과의 이별 등 외롭고 어두운 삶을 산 무명작가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결혼정보회사에서 절대 환영할 인물은 아니다. 천재적 재능마저 결국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김사라에게 물었다. "실제로 주인공과 같은 인물과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느냐." 그는 "술을 마시고, 약을 하는 등 너무 '별로'다"라며 "처음엔 열정 같은 사랑이 가능하겠지만 사랑은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버지니아의 역할이 너무 소극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지고지순한 인물로 답답하게 볼 수도 있지만 사랑을 대하는 순수한 모습이 예쁘다"면서 "첫사랑 엘마이라와는 달리 주인공의 천재성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진실로 사랑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실제 성격은 정반대이지만(웃음) 이 점이 배역에 더 몰입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이 작품은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밴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멤버 에릭 울프슨이 천재 작가의 작품세계와 미스터리한 삶을 음악으로 매만졌다. 한국 공연에서는 음악감독 김성수의 편곡 및 창작곡에 주목해야 한다. 김성수는 '첫 대면(The First Meeting)', '까마귀(The Raven', '다른 꿈(Another Dream)' 등을 새로 만들었다. 포의 대표작인 '까마귀'는 독일 초연 당시 낭송되었지만 뮤지컬에서는 주인공이 노래를 한다. 김성수 음악감독은 "이 작품 제안이 왔을 때 고민하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 에릭 울프슨이 참여한 뮤지컬이라 흔쾌히 한다고 했고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고 했다. 그는 "포의 작품을 초등학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 '까마귀'는 어릴 때 너무나도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았다"고 설명했다. "음악만 들린다"는 관객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 음악만 들렸다면 나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라며 앞으로 계속 고민하겠다고 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눈치를 채셨겠다. 줄거리나 세세한 무대 설명은 소개하지 않았다. 직접 보고 듣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연출과 배우, 음악 등 삼박자를 갖췄다. 궁금하다면 서두르시라. 천재의 사랑은 '기억되기에' 영원하다. 2월 4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한다.




문화부 기자 factpoe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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