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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갑질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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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 관점에서,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준호 교사는 <과학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를 '유아화'로 설명했다.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지만 인간은 1년 남짓 지나야 겨우 걷는다.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무리를 지어야 했다. 무리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고 서로가 순종적이어야 했다.

장동선 박사도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에서 비슷한 근거를 제시했다. 인간은 전체 뇌에서 생각에 할애할 수 있는 대뇌화 지수(EQ)가 단연 최고다. 고양이를 기준으로 원숭이는 2배, 돌고래는 5배, 인간은 7.5배 높다. 장 박사는 "사회적 집단이 EQ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결론은 이렇다. 맹수보다 늦게 걷기 시작하고, 빠르게 뛰지도 못하고, 이빨도 사납지 않은 '을'(乙)의 인류가 약육강식의 자연에서 '갑'(甲)의 정복자가 된 것은 무리를 이루는 사회성 때문이라는 것.
그런 사회성 때문인지 '갑질'의 역사는 유구하다. 조선시대 아전(衙前)이 대표적이다. 마을 관청의 중간 관리자다. 수령을 보좌해 세금 징수나 소송 업무를 처리했다. 아전의 처분에 따라 백성들은 세금을 더 내거나 덜 내곤 했다. 권력을 앞세운 아전은 가뭄이면 자기 논부터 물을 댔다. 염천땡볕에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을 지켜봐야 하는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갑질의 이면도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A기업 얘기다. 1차 협력사(B)가 A로부터 돈을 받고는 일부러 부도를 내는 바람에 2차 협력사(C)가 피해를 입었다. C는 A를 찾아와 연일 시위를 벌였다. 난처해진 A는 결국 B를 대신해 물품대금을 지불했다. 작은 기업이 더 작은 기업에 갑질을 하는 바람에 조금 큰 기업이 피해를 입은 꼴이다. 이 순간 '갑'은 A일까, B일까. '을'은 C일까, A일까.

갑을 관계는 실은 복잡다단하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갑이라고 하고, 대기업은 공무원이 갑이라고 하고, 공무원은 국회가 갑이라고 하고, 국회는 국민이 갑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민에게는 여전히 정치인이 갑이고, 직장인에게는 인사권자가 갑이고, 파견 직원에게는 정규직 노조가 갑이고,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식당 주인이 갑이다.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의 을인 '갑과 을의 뫼비우스 띠'.
문재인 정부의 '갑질근절' 구호가 요란하다. '정의구현'이라는 목표도 선명하다. 문제는 제대로 조준하느냐다. '을'을 가장한 '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먼 곳에 총질을 해대는 것은 아닌지. 난사가 능사가 아니다. 정밀 조준만이 구호도, 목표도 살린다.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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