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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조선이 알려주는 역사

최종수정 2016.12.01 14:16 기사입력 2016.12.0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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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신 산업2부장

조영신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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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1776년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자 왕좌에 올랐다. 정조가 왕권을 물려받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은 홍국영이다. 그는 정조의 세손(世孫) 지위를 지킨 보호막이자 방패였다.

홍국영의 정치적 삶은 정조의 즉위식 이후 180도 바뀌었다. 그는 도승지에 올랐고,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에도 임명됐다.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믿음과 신뢰는 더 이상 나열할 필요가 없다.
홍국영의 잘못된 정치적 삶은 정조 2년에 시작됐다.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앉힌 것. '충신'에서 '외척'으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권력의 단맛을 본 홍국영은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는 결국 정조 3년에 정치무대에서 내려왔고,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홍국영은 조선을 패망으로 이끈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조선은 당시 붕당(朋黨)정치로 몸살을 앓았다. 숙종의 환국정치, 영조·정조의 탕평책 모두 붕당의 병패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정조 승하 이후 탕평책은 동력을 잃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부터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세도정치가 조선의 정치를 쥐락펴락했다. 세도정치는 왕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자와 그 추종세력이 국정을 농단한 조선 후기 정치형태다. 전주 이씨가 진짜 왕이지만 실제 권력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손아귀에 있었다.

조선 후기 왕들은 이상하게도 단명했다. 빈자리는 어린 왕의 몫이었다. 후사가 없이 승하한 왕의 뒤는 먼 친척 '군(君)'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부족한 정통성과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세도가 사이에는 반대급부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자기 곳간을 채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백성의 삶은 고단할 수 밖에 없었다. 홍경래 등이 횃불을 든 이유였다.

어린 왕을 꼭두각시로 앉혀놓고 가문 간 밥그릇 싸움에 열을 올렸던 1800년대, 19세기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칼질' 밖에 몰랐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했다. 이 때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세계열강들이 세계로 뻗어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고종, 아니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의 폐해를 막아보겠다고 섭정을 했으나 이미 가마는 저 멀리 떠난 후였다. 고종의 양위로 순종이 왕권을 물려받았지만 3년도 채 지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자기 이익을 맞바꾼,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간신들이 궁중에 암약했다.

결국 조선은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됐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19년 만이었다. 세도가들이 왕의 권력을 마치 제 것인 양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조선은 망조의 길을 걸었다.

권력을 놓친 집안은 왕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신통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지만) 어쩌면 무당을 불러 왕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굿을 남몰래 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왕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 또는 기회였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통치자의 리더십에서 나온다. 강력한 리더십은 한 국가를, 또 한 민족을 번영으로 이끈다. 그렇지 못한 통치자는 권좌를 내주거나, 다른 국가(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다고 조선의 가슴 아픈 역사는 2016년, 병신년(丙申年)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조영신 산업2부장 as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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