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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여백의 미, 삶의 숨통을 틔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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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지 말아요!" 마눌님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왜 지저분하게 방마다 주렁주렁 매달려고 그래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창가를 파고들던 따사로운 햇볕이 마눌님의 높은 언성에 그만 얼어붙었습니다.

 오래전 찍어둔 자칭 작품사진을 베란다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빽빽한 자작나무 숲을 찍은 흑백사진입니다. 의기양양 액자를 들고 거실을 맴돌다 급기야 안방까지 침범을 했습니다. 거실엔 액자를 달아 둘 한 뼘의 여유 공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방도 피장파장이었지만 기어코 벽에다 못질을 시작했습니다.
 "제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난 하얀 백지만 있는 여유로움이 좋아요." 체념한 듯 마눌님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순간 망치질을 하던 손이 굳어졌습니다. '하얀 백지'라니,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등 뒤에 서 있는 마눌님에게 화끈(?)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그나마 다행일 정도입니다.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이랬습니다. 지난 초여름 출장 때 일입니다. 충청도의 어느 마을 앞. 여럿이 모여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참내 답답하게 또 벽화를 그리네. 좀 여유롭게 하얀 벽지 상태로 두면 안 되나요. 벽화 말고 알릴 게 그렇게도 없어요?" 동행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곤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애먼 문화관광해설사만 쓴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집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을 한 꼴입니다.
 벽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더. 요즘 마을마다 벽화 그리기가 유행병처럼 돌고 있습니다. 전국에는 벽화마을로 이름난 곳도 아주 많습니다. 인터넷에 벽화마을을 입력하면 족히 백여 군데가 나올 정도입니다. 경남 통영에 있는 동피랑도 그중 한 곳입니다. 누추한 골목과 가난이 묻어나는 작은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마을은 한때 철거가 예정됐던 산동네였습니다. 그러다 고단했던 시절을 지나온 서민들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시민단체가 골목마다 벽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통영항(강구안)이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전망과 추억을 건드리는 산동네 마을의 정취, 여기다가 어촌의 정서가 담긴 벽화까지 어우러진 마을은 금세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일까요. 전국의 담벼락에 울긋불긋 벽화가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이런 벽화에서는 쉽게 관광객을 모으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먼저 깔려 있습니다. '낙서'에 가까운 유치한 만화나 조잡한 풍속화로 도배된 곳도 흔합니다. 마을 주민들끼리 다툼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어 방치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명물'이 아니라 '흉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다시 안방. 못질을 포기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거실을 한 번 훑어봅니다. 출장 때 마주한 그 벽화처럼 지저분하고 답답합니다.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와 나의 욕심으로 가득 찬 벽입니다. 처음 이사 와서 느낀 '하얀 백지'의 여유로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두막 편지'라는 법정 스님의 책이 있습니다. 스님은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찾는다' 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모자라고 아쉬운 여백의 미가 있어야 우리 삶의 숨통이 트인다'고도 했습니다. 때로는 빈 공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이제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동안 마눌님의 숨통을 조인 것을 하나씩 제거해야겠습니다. 필요 없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일(특히 집 벽에 하는 못질)은 치우고 버려서 여백을 만드는 일입니다. 작은 탁자, 찻잔 하나. 책 몇 권, 그것만으로 충만하도록 말입니다.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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