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초절정이다. 아직 여름이 끝나려면 이십여일이나 더 남았다. '피서(避暑)', 말그대로 더위를 피해 떠날 때다.
만항재를 찾은날은 대구 달성지방의 수은주가 36.8도까지 치솟았다. 서울도 33도를 기록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전국이 벌겋게 달궈진 날이었다.
고한읍에서 만항재를 오른다. 700m고지에 있는 고한읍은 정오에 32도를 기록했다. 조금씩 고도를 높여 갈수록 온도는 내려간다. 고개 정상쪽에 운무가 밀려왔다. 낮은 목을 넘어온 운무는 순식간에 고개 정상을 빨아들였다간 토해놓고, 다시 빨아들이기를 반복한다.
만항재의 주인은 봄, 여름, 가을 내내 피고 지는 야생화들이다. 만항재의 또 다른 이름은 '천상의 화원'이기도 하다. 여름날 숲에는 '동자꽃' '자주꽃방망이' '둥근이질풀' '노루오줌' '기린촌' '긴산꼬리풀' 등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등산의 수고 없이 쾌적한 숲길을 걸으며 야생화를 보는 것은 만항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만항재 위쪽은 낙엽송 군락이다. 쭉쭉 뻗은 낙엽송들이 마치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특히 운무가 자욱할 때 낙엽송길을 산책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만항재에서 태백으로 내려가는 한편에 정자가 있다. 두툼한 이불을 들고 온 사람을 만났다. 아예 잠자리를 정자로 옮긴 것이다. 여름이면 태백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어김없이 정자에 오른단다. 이곳에선 흔한 풍경이다. 천연에어컨이 돌아가는 자연의 품에서 하룻밤,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찜통더위도 없고 끈적끈적한 열대야로 잠 못드는 밤은 더더욱 없다. 딴세상 이야기다. 만항재는 지금 22도다.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