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善惡)과 미추(美醜) 혹은 우열(優劣)의 이분법적 잣대에 놓이는 생각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은 자꾸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떤 것은 아예 흑백과 명암이 뒤바뀝니다. 겉과 속이 자리를 바꾸고, 아래 위가 거꾸로 섭니다. 으뜸과 버금이 엇갈리고 바탕과 언저리가 헷갈립니다.
매미의 울음도 이제 속절없이 잦아들고 있는 산길을 걷다가, 당신들 생각이 났습니다. 미뤄두었던 사과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땅의 사람들은 참 오랫동안 당신들을 세상에 없어도 그만인 존재의 대명사로 생각해왔습니다. 개미처럼 근면 성실을 모토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나무 그늘에서 기타나 치며 노래하는 잉여(剩餘)의 생명. 일도 안하고 얻어먹기나 하는! "
하여, 당신들은 한 시절 개미들의 냉대 혹은 천대를 받으며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딸이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는 꿈을 밝히면, 가차 없이 꾸짖고 야단을 치는 부모가 많았습니다. 광대 혹은 딴따라가 되려는 자식을 아버지는 내쫓으려 하였고, 어머니는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사과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일을 거룩한 노동으로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노래 한 소절, 춤사위 하나가 얼마나 뼈아픈 준비와 훈련의 시간을 거쳐야 나오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당신들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가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게 걸어온 길 끝에서 받게 되는 것인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당신들의 일이 그 어떤 행위보다 뜨거운 '이타행(利他行)'임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받은 것만큼, 돌려주어야 할 것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당신들의 춤과 노래가 세계를 움직이고 나라의 이름값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화「개미와 베짱이」가 우리에게 전해준 교훈이 얼마나 부당하고도 편파적인 것이었는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난주에 우리 곁을 떠나간 한 분을 위해 하늘나라에 편지를 쓰려 합니다. 당신들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을 떨치며, 그분의 공적을 기리는 공경과 예의의 훈장을 바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늘나라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누구보다 자유롭던 시인 천상병의 시('편지') 한 대목을 빌려서 씁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신) 아버지 어머니…. 희극배우 한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주십시오. 이름은 구봉서(具鳳瑞)입니다. 만나서 못난 사람들의 뜨거운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웃음과 즐거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분만은 아무도 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저속했느니, 유치했느니 했지만 그에게서 웃음보따리를 선물 받지 못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영화배우로서도 좋은 역할을 했지만, 웃기는 사람이 영화상의 수상자가 되어선 곤란하다고 불이익을 받기도 한 사람.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던 시절,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했다는 사람. 어떤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그 사람만큼 잇속도 계산속도 없는 위로의 시간을 주었을까요.
악극단의 아코디언 주자로 시작해서 희극배우로 방송인으로 우리 현대사의 모든 장면들을 유머와 재치로 녹여낸 사람, 그에게서 우리가 오해했던 베짱이의 얼굴을 봅니다. 베짱이들은 개미들만큼 열심히 씨를 뿌립니다. 개미들이 들판에 씨를 뿌릴 때, 베짱이들은 개미들 마음에 씨를 뿌립니다.
그토록 사납던 여름도 결국은 물러나고 있는 이때, 이 시대 모든 매미와 베짱이들의 노고를 생각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웃음꽃 한 송이, 노래 꽃 한 다발에 얼마나 많은 땀과 정성이 스며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막둥이 아저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