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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사람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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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엘 가서 차를 타고 한나절쯤 달리다보면 문득 일어나는 생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숨을 데도 없고 도망 다닐 데도 없을 만큼 좁은 나라.' 순간, 우리가 먼 길의 대명사처럼 배웠던 '천리 길'이 사실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란 것과 '삼천리 방방곡곡'이 그다지 커다란 집합이 아니란 깨달음에 이르지요.
 그런데, 제 그런 생각을 일찍이 흔들어 놓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좁은 국토에서 두어해(1997~1999년)동안이나 신출귀몰했던 탈옥수. 장장 907일을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사람. 수사망을 뚫고 종횡무진 국토를 누비던 그가, 우리나라가 그렇게 작지 않은 땅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동시에,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근사한 로드무비나 <도망자>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필름은 미국만큼 큰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 그것은 땅덩이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숨바꼭질의 무대가 크다고 더욱 재밌는 놀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숨다가 찾다가 새삼스럽게 발견되는 장소의 매력과 시간의 아우라(aura)!"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 장르의 작품들이야말로 사람과 자연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는 드라마니까요. 주인공들의 행로와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 길과 하늘만이 알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젠 다릅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에 끼어들어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카메라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는 요즘 온종일 카메라 앞에 서 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그에게 보고합니다. 하여, 그것은 우리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몇 시에 집을 나서는지, 무슨 담배를 피우고 어떤 맥주를 즐기는지, 몇 번 버스를 타는지. 우리 일을 우리보다 더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일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의심을 받게 된다면 경찰은 저에 관해서 저보다도 카메라에게 먼저 물어볼 것입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이리로 지나간 시간이 몇 시인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걸음걸이는 어땠는지. 혼자 지나갔는지, 동행이 있었는지. 모자를 썼는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건 무엇이었는지….'
[윤제림의 행인일기] 사람에게 물어보자 원본보기 아이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일을 사람에게 묻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을 카메라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일에 사람의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기계한테 잠을 깨워 달라 하고, 기계한테 날씨를 묻습니다. 선생님 말씀조차 인터넷에 물어 진위(眞僞)를 확인한 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길을 내비게이션에 물어보고서야 핸들을 잡습니다.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거울에게도 사람에게도 묻지 않습니다. 셀프카메라를 켜고 화장을 고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지 않습니다. '셀카 봉(棒)'으로 간단히 해결합니다.
 나그네가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묻고 내비게이션에 묻습니다. 돌다리를 건너오는 사람을 눈으로 보고서도 돌다리를 의심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길잡이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진실의 증거가 되지 못하고 의혹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이 목표나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세상에 퍽이나 반가운 문구(文句)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길 가르쳐주는 집". 남대문 시장 입구 대로변 생수와 음료수를 파는 노점상에 붙은 안내문이었습니다. 혹시 구청이나 경찰서의 부탁을 받은 것은 아닐까, 마음 졸이며 물었습니다. 주인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은데 행인들 눈치만 살피며 허둥대고 쭈뼛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간절한 눈짓으로 도움을 청해보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애꿎은 핸드폰만 들여다보면서 '그런 건 안 나오는데…'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젊은이들… 보다 못해 저렇게 써 붙이게 되었지요."
 사실, 인터넷과 내비게이션에게 물어야 할 일보다 사람에게 물어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 빈대떡집 위치와 고등어구이 백반 값이야 기계가 답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집 주인 할머니가 감기에 걸려서 가게 문이 닫혔다는 말은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땅을 조금 더 넓게 쓰는 방법 하나는 기계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세우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길게 빼서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는 없는 이야기,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장소를 알게 될 테니까요. 지나는 길에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는 것도 모르고 편의점에 가서 생수를 사 마시는 나그네는 얼마나 딱한 사람입니까.
 사람에게 묻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허리우드 영화문법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한 사건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돌아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서 멋진 기행문을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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