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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통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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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극장은 시장 골목 안에 있습니다. 포목점, 국밥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횟집과 어물전, 채소가게와 마주 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시장이 그렇듯이 여기도 먹거리 찬거리들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마중합니다. 갯것들, 비린 것들이 코 밑을 간질입니다.
 말하자면 이 극장은 모든 감각기관이 일시에 중심을 잃어버리게 할 만큼 번다한 시장 복판에 있습니다. 물론, 영화관이라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여긴 연극전용관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극장을 차린 사람들이 참 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복잡하고 정신없는 장소로 누가 연극을 보러 오겠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예술작품을 팔아야겠느냐며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공연시간 맞춰 극장 앞에 가보면 그 모든 걱정들이 기우(杞憂)임을 알게 됩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삼삼오오 모여든 관객들로 매표소 앞은 금세 소문난 식당 문전처럼 수선스러워집니다. 어서 들어가 앉아서 맛있는 음식의 진가를 음미하고 싶어 하는 표정들입니다.
 이쯤 되면, '시장 안의 극장'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척 잘 어울리는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극장이 무슨 일을 합니까? 사람살이의 바탕을 보여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맛보아야 할 것이 밥과 국물만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인간의 체취를 확인시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통영에서 원본보기 아이콘


 영화가 정찬(正餐)이라면 연극은 우리 인생이 섭취해야 할 날것이지요. 지금 막 밭을 떠나온 푸성귀거나, 새벽그물에 올라온 바다의 생물(生物)입니다. 횟감입니다. 먹기도 아까울 만큼 곱고 단정하게 차리고 젓가락을 기다리는 그것이 아니라, 꾸밈없으나 정성껏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버무려진 막회(膾)입니다.
 시장 안의 소극장은 그런 것을 팔고 있었습니다. 일상에서는 쉽게 충족되기 어려운 정신의 허기와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는 메뉴입니다. 재료의 원산지 또한 이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고장이 낳은 예술가들 이야기. 그들의 삶에서 뜨거운 부정(父情)과 가족애를 찾아내는가 하면(연극 '동치미'),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만큼 애틋한 러브스토리(연극 '꽃잎')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그런 작품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줄을 이을 것 같습니다. 이 고장에 태(胎)를 묻은 예술가들만 꼽자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니까요. '토지'의 박경리, '꽃'의 김춘수,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연극의 동랑 유치진, 미술의 전혁림, 음악의 윤이상….
 여기 출신은 아니지만 대표적 작품의 연대기(年代記)가 이곳의 시간들로 채워지는 화가 이중섭, 통영 바다를 '자다가도 일어나서 가고 싶은' 곳이라고 고백하며 빛나는 시편들을 남기고 간 시인 백석....
 거기까지라면, B극장 사람들이나 이 지역 연극인들의 창작일지가 '통영 인물열전(人物列傳)'으로 폄하될 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꿈과 노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연극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것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통영의 뭍과 섬들이 예술의 힘으로 생기를 잃지 않고, 이 고장 마을마다 풍성한 이야기가 넘치게 하려는 소망을 지녔습니다. 그 결과물들도 이미 적지 않게 쌓여 있더군요. '통영연극예술제' 안내데스크에서 그 물증(物證)을 보았습니다. '시가 흐르는 섬마을'. '가는개 마을의 노래'.... 소박한 책자들이었으나, 내용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사량면 양지리'라는 섬마을 주민들의 앤솔로지였고, 또 하나는 '가는개(細浦)'라는 갯마을 사람들의 시집이었습니다. 양쪽 다 B극장 사람들을 비롯한 통영 연극인들의 집요한 노력의 결실이더군요. 한권은 영한대역(英韓對譯)으로 외국인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만든 이들의 긍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생각건대, 그들은 극작(劇作)의 샘물이 어디 있는지를 오래 전에 알아차렸습니다. 연출과 연기의 스승이 누군지를 깨쳤습니다. 그리하여, 연극예술의 교사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에 있음을 알고 섬으로 갔습니다. 제 고장 어른들로부터 이야기의 곳간열쇠를 물려받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숙제임을 절감한 까닭입니다.
 연극이 장터 상인들의 일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시장 복판에 극장을 지은 사람들다운 태도입니다. 박원선(사량도 주민, 1939년생) 할머니의 시 한편을 읽다가, 연극 한편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개를 판다/오금이 저린다// 마늘을 심는다./복숭아씨가 애린다.//병원에 간다//조개 팔고 마늘 팔아도/병원비도 안된다.//일하기 위해 병원 가는지/병원 가기 위해 일하는지//그러다가 중풍을 맞았다.//많이 좋아졌다./약이 밥이 되고/밥이 반찬이 되었다.//오늘도 절름거리며/텃밭을 가꾼다."
 다음 통영 여정에는 사량도를 넣고 싶습니다. 그 섬 안의 길이란 길은 모두 연극이 되어도 좋을 이야기길일 것만 같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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