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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그 여름날의 심학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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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씩 작은 라디오 방송국엘 갑니다. 지하철을 삼십분쯤 타고 가서 다시 삼십분쯤 걸어갑니다.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썩 물러나 앉은 '올드 브랜드'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연관된 시를 읽는 시간입니다.

지난주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하다가 '심청가' 한 대목을 낭독했습니다. 심봉사가 황성잔치에 가는 여정이지요. 뺑덕 어미는 다른 남정네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치고 심봉사 혼자 뙤약볕 속을 걸어가다가 물소리 반겨 듣고, 목욕을 하는 광경입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오뉴월 염천에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속에선 천불이 날 지경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심봉사 좋아라, '얼씨구 절씨구. 저런 물에 가 목욕을 허면 서러운 마음도 잊힐 테요, 깨끗한 정신이 돌아올 테니, 어찌 아니 좋을손가?' 상하의복을 벗어놓고 물에 가 풍덩 들어서며, '에, 시원허고 장히 좋네.' 물 한 주먹 덥벅 쥐어 양치질도 퀄퀄 허고, 물 한 주먹 덥벅 쥐어 가슴도 훨훨 씻어보면, '에, 시원허고 상쾌허다. 삼각산 올라선들 이에 더 시원허며, 동해수를 다 마신들 이에서 더 시원허리.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툼벙툼벙 장히 좋네."(한애순 창)

[윤제림의 행인일기] 그 여름날의 심학규씨 원본보기 아이콘

생각만 해도 시원해집니다. 어떤 음료, 어느 빙과(氷菓)가 저 심봉사가 만난 계곡물만 할까요. 그러나 청량감도 아주 잠시. 심봉사는 금세 또 허망하고 슬퍼집니다. 목욕을 하는 동안, 어느 도적놈이 옷가지를 홀랑 집어 가버린 것입니다. 심봉사는 또 열이 오릅니다. 다시 비난과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오릅니다.

누가 심봉사의 불을 끄나 안타까워 할 때, 고마운 이가 나타납니다. 이 고을 무릉 태수입니다. 실성한 사람처럼 알몸으로 행차를 막아서는 심봉사에게 태수는 연유를 묻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그가 선뜻 의복을 내어 줍니다.
심봉사는 백배 감사하고 다시 길을 갑니다. 가다가 그늘에 앉아 쉬고 있자니, 동네 부인네들이 와서 방아를 찧어달라고 청을 합니다. 방아타령을 하면서 한바탕 일을 하고, 술과 밥을 얻어먹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알바'를 한 셈인데, 일값을 제대로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심봉사는 황성 땅을 밟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늘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야속합니다. 이런 궁금증 때문입니다. "왜 심황후는 황주 관아에 영을 내려 부친 심학규 씨를 모셔 올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왜 직접 도화동으로 행차하여 부녀상봉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저는 지금 판소리 사설에서 이야기의 합리성이나 리얼리티를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폭염 속 심봉사의 처지가 너무나 딱해서 이야기의 구성까지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황금수레를 탈 수도 있는 신분의 아버지가 저토록 생고생을 하게 한 심황후에 대한 불만이지요.

가만가만 짚어보면, 심청가 후반부의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지금 우리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학규 씨의 여름을 더욱 혹독하게 만든 일들과 오늘 우리를 더욱 열불 나게 만드는 사건들이 잘도 포개집니다.

딸 팔아 '전곡(錢穀)'이나 좀 만진다는 걸 알고 심봉사를 속여넘긴 여자. 남의 여자를 꾀어 줄행랑을 친 사내. 아내도 잃고 외로이 길을 가는 불쌍한 홀아비. 빈털터리 맹인의 옷을 들고 간 도둑. 알몸으로 땡볕 속을 걸어간 노인. 앞 못 보고 물정 모르는 행인을 아주 헐값에 부려먹은 방앗간 여인들…. 요즘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의 주인공들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그러나, 심청가 속의 못된 사람들은 그리 오래지않아 자취를 감췄을 것입니다. 옷을 잃은 심봉사에게 무릉 태수가 보여주는 행동이 그런 심증(心證)을 단단히 굳혀줍니다. 그는 심봉사를 위해 이렇게 명령합니다. 가마꾼에게 이르되, '너는 수건을 써도 상관없으니 갓과 망건을 벗어서 심봉사에게 줘라' 합니다. 수노(首奴)한테는 여비는 물론, 담배와 담뱃대까지 챙겨줄 것을 당부합니다.(정권진 창)

내친 김에, 멋대로 상상해보고 싶어집니다. 심청이 아니 심황후의 나라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 시절이었기에 황후의 아버지가 황성까지 걸어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황후는 아마도, 사사로운 일로 나라 전체를 수고롭고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심황후가 궁금했던 것은 아버지의 일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친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나라 안에 얼마나 되는지, 그들 모두를 위로할 수 있는 법은 없는지.' 사람을 불러 묻고, 천자께 청을 했겠지요. 이윽고, 황후의 마음씀씀이에 탄복하며 천자가 하교(下敎)했을 것입니다. "황성에 맹인잔치를 베풀라."

심봉사와 나라 안의 모든 맹인들이 일시에 눈을 뜨게 된 내력을 판소리에서는 부처님 도술(道術)이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송천자(宋天子)와 심황후 그리고 무릉태수처럼 '백성의 값을 아는 사람들의 은공'으로 믿고 싶어집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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