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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보수와 꼴통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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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미디어 좌충우돌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나는 보수라는 말에 묻어있는 퀴퀴한 냄새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다. 멀쩡한 이 땅의 사람들을 두 진영으로 나눠놓고, 거기에 자기를 맞춰가는 분위기도 싫어하지만, 꽤 오랫동안 울트라 보수로 손꼽히는 신문에서 뼈를 묻어왔던 기자였다는 이유로 나를 '꼴보'로 규정짓는 선입견에 대해서도 부당하게 생각한다. 어디에 있으나 나는 나의 가치관과 신념이 작동되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보수든 진보든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는 일은, 편을 가리지 않고 싫어해왔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여하튼 그런 내가, 어느날 이 땅의 여당이 당의 강령에 있던 '보수'를 지우면서 자기 변색을 시도하는 모양새를 보면서, 대단히 놀랐다. 아무리 봉투정당 차떼기당 그네타는 향단이가 되어 질식 직전에 있다 해도, 자기 호적을 파가면서까지 자기부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걸 유연하다고 봐야 할까, 다급하다고 봐야 할까. 다급하니 뭐든지 내다 파는 꼴이라고 봐야 할까. 혀를 찬다.
하지만, 보수가 뭔지 생각은 한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수구꼴통으로 정의되어온 우리의 보수네가 과연 그 이름값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어떤 이름 속에 담겨있었는지, 주제 파악은 하고 나서 호적을 파더라도 파야하지 않을까.

보수(保守)는 굳이 어원을 캐물어 꼬장꼬장해질 것도 없다. 뭔가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이 말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 뭘 보호하고 지키는 것인지가 중요하겠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호하고 지킬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이미 존재하거나 형성되어있는 무엇이라야 한다.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것을 지킬 순 없지 않은가. 여기에 신념이 개입한다. 지금 현재까지 되어있는 것이, 지킬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성취라고도 말할 수 있고 축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지금 이 땅의 문화와 삶과 체제와 성취를 이루고 있는 갖가지 내용물 중에 지킬 것이 많은가, 아니면 버릴 것이 많은가. 그것을 따져 지킬 것이 그래도 더 많으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유익하고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보수의 신념이다.이에 맞서는 혁신은, 지킬 것보다 바뀌야할 것이 더 많으며 바꾸는 것이 더 미래를 위해 나은 선택이라고 보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는 많은 성취를 이룬 자들, 정치적 성취, 경제적 성취, 사회적 성취 등등을 이룬 사람들에게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작은 성취, 삶의 작은 축적들을 귀하게 여기는 나같은 사람, 이 땅의 역사가 준 교훈들이나 전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것들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은 중요하기 짝이 없다. 기존의 가치 중에서 뒤엎어야할 것보다, 지키고 존중하여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 많다는 관점 또한 나의 보수적 사유의 기틀이다. 보수는 지나간 것들, 흘러간 것들, 이미 이룩된 것들이 미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믿는 태도이다. 물론 잘못된 것들도 축적되고 나쁜 트렌드나 욕망들도 함께 종양처럼 성장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고 신체 전체를 다 버리고 새롭게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수하면서 미래를 만들겠다는 신념은, 세상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모두 바꿔버리겠다는 조급증에서 해방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보수의 미덕은 여유와 냉정이다.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쳐쓰겠다는 태도이다. 답답해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신중함과 느림 속에도 정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기술 혁신으로 세상이 전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이 지녀야할 원칙들과 품격들, 그리고 사회적인 기초약속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자칫 제 호적을 파버린 보수가, 제대로 감도 잡지 못한 새로운 것들과 깨춤을 추느라, 그나마 보수해왔던 진정한 것들마저 내동댕이치는 게 사실 더 큰 문제다. 그건 보수가 뭔지도 모르는 정말 꼴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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