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몇 해 전 억대 연봉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 사실이 이내 주변에 알려졌다. 그때부터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을 때는 억대 연봉자가 식사 값을 지불해야 했고, 경조사의 축의금ㆍ조의금을 낼 때는 억대 연봉자 답게 두툼한 봉투를 준비해야 했으며, 저녁 회식 자리에서는 억대 연봉자로서 통 크게 쏴야 했다. 어쩌다 계산을 거르거나 얇은 봉투를 내밀면 '야박한 인간' '옹졸한 사람'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뒷덜미를 덮쳤다. 연봉이 늘어난 만큼 품위 유지비는 산술급수가 아닌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세금과 품위 유지비를 빼면 실질 수입은 제자리였다. 급기야 아내가 폭발했다. "연봉이 늘었다고 너무 헤픈 거 아니냐"는 타박에 그의 항변과 해명은 번번이 무기력했다.
지금 얼마를 받든 더 많이 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한자 억(億)은 人 + 日 + 心 + 立로 이뤄졌다. '사람(人)이 매일(日) 마음(心)을 세우면(立) 억(億)이 된다'는 의미다. 어느 분야든 실력과 능력을 갈고 닦아 대가(大家)의 경지에 이르면 존경과 대접을 받게 된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그제(3월31일) 연봉 5억원이 넘는 상장사 등기임원들의 보수가 공개됐다. 일반인들은 평생 만져보기 어려운 돈을 한 해에 벌어들이는 그들의 능력을 누구는 부러워하고 누구는 마뜩잖게 여긴다. 고액연봉 임원 중 누구는 합당한 대접을 받았고 누구는 과도하게 챙겼다. 불로소득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회사실적이나 국민정서를 무시한 이기적 연봉은 조롱받아도 싸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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