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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참외는 참 외롭다(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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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선생님 원두막집에 갔다가 맛있는 참외 얘기를 읽는다. 맛있다 함은, 여물 씹는 소처럼 오래 우물거릴 수 있는 거리였단 얘기다. 어린 시절 나는 천천히 반추하면서 눈을 꿈벅이는 저 순한 짐승을 보면서, 영혼이란 걸 생각한 적 있다. 목에 매달린 핑경 소리는 생각의 음표같았다. 근데, 참외 얘기가 왜 우형(牛兄) 얘기가 됐을까.

참, 외. 두 글자를 소가 여물 씹듯 씹는다. 瓜와 melon과 '외'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기발함이 재미있고, 그것의 참외의 생리로 연결되는 게 기묘하다. 오래 전 누군가가 참외꼭지 위의 줄기와 잎을 보고, 문득 외로움을 생각해냈을까. 그 외로움을 이름에다 넣을 생각을 한 사람이라면, 그 또한 꽤 외로웠겠다. 제 처지가 그렇지 않고서야, 무심한 사물의 사정이 그렇게 감정이입될 리 없다.
우리가 김서령답다, 혹은 빈섬스럽다,라고 우스개로 말하듯, 참외도 그런 뒷말을 붙여준다면 '롭다'를 붙여주는 게 그럴 듯 하다. 참외롭다. 참외가 있다는 건 그렇지 않은 외가 있다는 의미이다. 어린 우린, 오이를 '물외'라 그랬다. 이때 붙는 '물'이란 가짜며 엉터리며 단맛이 영 부족하다는 뜻이다. 오이는 외롭지도 못했다. 물외가 나오니 생각난 건데,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이 현대 미국소설을 강독하는 시간에, watermelon을 참외로 착각하셨다. 참외가 피처럼 붉다고 하니 얼마나 기이한 문장이냐고 열변을 토하시는데, 그걸 지적해드릴 수도 없고 입은 근질근질한데 참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피처럼 붉은 참외라. 그러니까 교수님은 워터멜론을 그야말로 '물외'로 읽은 셈이다. 그 열강에 못을 박으며 "수박인데요"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그분은 참 '외'로웠을 것이다.

외롭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내게는 긴 목이 떠오른다. 목선의 서늘함이 외로움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또 내게는 그 목에 닿는 바람결이 떠오른다. 목선을 따라 흐르는 바람의 감각, 그게 또 왜 외로움인가. 외롭다는 말을 들으면, 죽기 전 조병화 시인이 적어줬다는 '그래 얼마나 외로운 혼자이요?"라는 말이 떠오른다. 외롭다는 말을 들으면 요의(尿意)가 충만한 채 다급하게 해우소를 찾는 시선이 떠오른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아무리 귀찮고 번거롭고 불가능하더라도 나 스스로 해야하는, 오줌 누는 일은, 내 외로운 살이의 진상을 만나게 한다.

어디 참외만 외롭겠는가. 모든 존재는 평생 저주같이 부여받은 그 고립의 몸을 잊으려 그토록 관계를 갈망하고 그토록 소통을 꿈꾸려는 것 아니겠는가. 덩그라니, 혹은 동그마니, 참외가 하나 앉아있다. 그 수많은 참외들의 참 외로움, 그걸 따뜻이 살필 수 있는 눈만 있더라도, 그는 조금, 덜 외롭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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