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구채은 기자] "은행들이 돈 좀 번다고 '퍼주기식' 대출을 진행하다가는 IMF 구제금융 때처럼 연쇄 파산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전반적인 경기가 안 좋을 때는 기업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출금을 갚지 못할 공산이 큽니다. 다시 한 번 은행이 리스크관리에 실패하면 책임은 전 국민이 져야 합니다."
시중은행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리스크에 대한 정확한 판단 없이 진행되는 정부주도 대출은 곧 국가 부도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은행들은 창조금융 정책에 발맞추겠지만 최소한의 대출위험관리를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착시다. 올 2분기 국내은행의 당기순이익은 전년동기대비 1조4000억원 증가한 2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에 낮아진 순익에 따른 기저효과였다. 같은 기간 은행권의 이자이익은 소폭 증가에 그쳤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은행의 이자이익은 8조8000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불과 1%(1000억원) 증가했다. 2분기 국내 은행 총자산순이익률(ROA)은 0.5%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29%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0.21%)에 비해 소폭 개선된 수치지만 최근 10년간 평균치(0.65%)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부실채권 비율과 잔액도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완벽한 안전지대에 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정부가 기술금융을 명목으로 무담보대출을 강화하라고 고강도 압력을 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은행업계의 지적이다.
A은행 리스크관리 담당임원은 "1997년부터 정부에서 은행에 대출을 활성화하라고 해서 사업자등록증만 있으면 될 정도로 대출이 쉬웠다"며 "은행에 돈이 다 빠져나가고 결국 파산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제2의 우리은행이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IMF 구제금융 때 정부 개입의 결과가 현재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의 전신은 한빛은행이고 한빛은행은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등이 합병된 은행이다. 상업은행은 우리나라 최초 민영은행이었지만 1997년 당시 기업에 무리한 대출을 해주느라 체질이 약화돼 예금보험공사가 지분을 73% 매입했다. 결국 정부가 주인인 은행이 됐다. 1998년 경영이 악화된 한일은행 등과 다시 합병했다.
금융업계가 정부의 정책 요구가 무리수인 것을 알면서도 꼼짝 못 하는 이유는 한국 금융업의 시스템적 문제 때문이다. 은행업은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라이선스 사업이다. 국내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들은 정부의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 임명될 수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지금도 정부가 시중은행에 고위험군 대출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보면 외환위기 이전 시절과 다를 바가 없다"며 "외국인 주주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은 결국 다시 은행으로 돌아온다. STX그룹 대출과 관련해 산업은행 임직원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무더기 제재를 받았다. 금융감독원은 STX 관련 업무를 맡았던 산업은행 부행장을 비롯한 임직원 20여명에 대한 제재 내용을 사전 통보하기도 했다.
시중은행 기업여신 담당 임원은 "최소한의 대출 리스크관리에 있어 은행의 고유권한을 정부가 무력화해서는 안된다"며 "리스크관리를 금융보신주의가 아니라 건전성 유지 노력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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