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을 하려면 집금오요, 장가들어 처를 얻으려면 음려화라." 광무제가 젊은 시절 남긴 말이다. 집금오는 수도의 치안 담당자고, 음려화는 당대의 미인이었다. 평범한 유수를 정치의 한복판에 몰아넣은 것은 왕망의 난정이었다. 호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뒤를 이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형주 녹림산에서 일어난 녹림군, 산둥에서 일어난 적미군이 대표적 세력이었다. 전성기 때 5만명에 달한 녹림군은 전염병 때문에 그 세력이 격감했고 남양의 호족 세력에 귀순했다. 남양의 호족 대표는 유씨였다. 호족 세력과 남하한 반란 세력은 반왕망 세력의 지도자로 남양 유씨인 유현을 옹립하니 그가 갱시제다. 유연과 동생 유수는 유현의 휘하로 들어갔다. 동쪽 지역에서 세를 얻은 적미군도 왕망 타도에 뜻을 같이했다. 남양 호족과 녹림ㆍ적미군의 결합으로 왕망의 패망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근엄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창업 군주에게 흔히 발견되는 파격과 거친 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사를 신중하게 중론을 물어가며 온건하게 처리했다. 전한의 수도 장안이 화려한 반면 후한의 수도 뤄양이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창업 황제의 개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광무제는 대대적인 행정 개혁에 착수해 관리와 관청의 수를 대폭 줄였다. 군사제도도 손질해 전한의 국가개병제도를 폐지했다. 개국공신이 거느린 군대도 황제 직속군단에 편입했다. 전한 말과 신나라를 거치면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뒀다. 다행히도 북방 세력인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돼 대외적 긴장관계가 완화됐다. 광무제 후반은 철저히 휴식으로 일관했다. 노예해방 조서를 빈번히 발표했고 노약자, 빈곤한 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통치술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저는 부드러운 도리로 천하를 얻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부드러운 도리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유도치국(柔道治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늘 근검절약을 강조했다. 지방 특산물과 진귀한 음식을 조정에 바치는 관행을 폐지했다. 27년 특별 조서를 내려 "각 군국이 보내온 산해진미는 절대로 받지 말 것이며, 감히 금령을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천명했다. 아랫사람에게 보내는 조서는 모두 일찰일행(一札一行)으로 목간 하나에 글 열 줄을 썼다. 그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을 늘 군신들에게 강조했다. 매사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공무를 처리하고 행동거지도 마치 살얼음 위를 걷거나 깊은 연못 앞에 선 것처럼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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