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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스토리 인물사] 무제, 위풍당당했던 漢 왕조 55년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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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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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유철(劉徹ㆍBC 156~BC 87)은 한왕조의 제7대 황제다. 55년간 재위하면서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서를 저술한 후한의 반고는 무제기에서 그를 웅재대략(雄才大略)의 인물로 극찬하였다. 중국 역사상 그만큼 좋은 여건에서 통치를 시작한 황제는 흔치 않다. 그는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경제로부터 엄청난 재정잉여금을 넘겨받았다. 문경지치(文景之治)라는 말처럼 수십년간 정치는 안정되었고 사회도 평온하였다. 변경의 혼란도 진정되었다. 오랜 휴식으로 나라 전체에 도전과 도약의 기운이 생동하였다.

그는 즉위 초기부터 강력한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BC 140년 여러 관리와 제후에게 '어질고 바르며 아첨하지 않고 제왕의 잘못을 바로잡을 줄 아는' 선비를 추천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재 등용 제도 확립이 중요함을 일찍부터 인식하였다. 이후 재위기간 내내 인재추천령을 자주 반포하였다.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국가 통치이념으로 유학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수도에 태학을 설치하고 매년 성적이 우수한 인물을 낭중으로 임명하였다. BC 134년에는 효행이 뛰어나거나 청렴한 인물을 발탁하는 효렴(孝廉)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는 적극적 대외 정벌로 중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다. 이때 확립된 중국 영토가 오늘날 중국인의 국토 관념의 기초가 되었다. 제위 초 푸젠성의 민월국에 분쟁이 발생하자 첫 출병을 단행하였다. BC 112년에는 남월국을 공략하여 중국 서남지역의 이민족들을 흡수하였다. 한반도에도 원정군을 파견하여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을 설치하였다.

뭐니 뭐니 해도 대외 정벌의 백미는 오랜 라이벌 흉노와의 싸움이었다. 북방의 강자인 흉노는 한나라에 큰 화근이었다 . BC 129년 흉노공격을 시작으로 대장군 위청은 일곱 차례 토벌에 나섰다. 위청은 황후 위자부의 남동생으로 실력과 인품을 갖춘 명장이었다. 후반기의 흉노 정벌은 곽거병이 주도하였다. 곽거병은 위청의 또 다른 누이인 위소아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황후의 일족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자만심 강하고 저돌적이었다. 이런 자신만만함이 무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그는 불과 23세로 요절한다.

무제의 서역 경영의 야망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장건이다. 그는 산시성 한중 출신으로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10년간의 흉노 체류, 아프가니스탄 주변의 대월지국과 대하국 방문 등 장장 13년 만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서역 정벌이 이루어졌다. 서역과의 교통로가 확보되자 포도, 옥 등 진귀한 물건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특히 무제가 탐낸 것은 한혈마(汗血馬)로 불린 대완국의 명마였다. 쉬지 않고 만리를 질주하며 피와 같은 붉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무리한 대외 사업은 국고를 고갈시켰다.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경제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뤄양 상인의 아들인 상홍양은 이런 중책을 수행하기에 적임자였다. BC 119년 소금과 철의 전매제가 실시되었다. 군수법과 평균법을 제정하여 상품의 유통을 통제해 대상인의 폭리를 억제하였다.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통화가치 안정을 도모하였다.

무제의 말년은 무고로 점철되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고발이 빈번했다. 재상의 절반 이상이 처형될 정도로 비정상적 사회가 되었다. 황태자 유거 또한 혹리 강충의 무고에 희생되었다. 궁지에 몰린 황태자는 반란을 시도하지만 실패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5년 후 무제도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사가 에드마르 사반은 "무제의 제위는 긴 기간이었지만 이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무제의 일관된 정책들은 중국에 내재된 잠재력이 완전히 발휘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요시카와 고지로 교토대 교수는 한무제의 치세를 "너무도 위풍당당한, 지극히 시끌벅적했던 시기"로 규정한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그를 혹독히 비판하였다. 그에게는 칭송이 반, 비난이 반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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