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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신숙주와 기생 차군의 사랑(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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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7)

[千日野話]신숙주와 기생 차군의 사랑(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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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씀입니다. 보한재(신숙주ㆍ1417~1475)가 차군(此君)이란 기생에게 행한 담담한 면모를 보면, 선비의 기품이 이런 거구나 싶더군요."
"차군이라…. 차군은 왕휘지가 대나무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대나무처럼 절개가 높았던 여인이었던가요?"

"허허, 글쎄요. 보한재가 호남에 공무를 보러 갔다가 재예와 미모가 뛰어난 차군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지요. 헤어지는 날 보한재가 그녀에게 왕휘지의 글귀인 '하가일일무차군(何可一日無此君ㆍ차군 없이 어찌 하루라도 견디겠는가)'을 치마폭에 써주었습니다. 그것을 받고 여인이 선물을 내놓으려 하자 고개를 저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애물(愛物)을 주면 그리움만 커지는 법이니, 누군가에게서 받은 선물을 내게 다시 주는 건 어떠한가?' 그러자 차군은 족대(足臺ㆍ술상 다리에 까는 작은 널) 하나를 주었지요. 족대 뒤에 보니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척족대증패거(一隻足臺曾佩去) 거상시복암사군(擧床時復暗思君)' 한 짝의 족대야 곧 차다 버리는 거지만/상을 들 때마다 다시 몰래 그대를 생각하리. 그런 시를 본 보한재의 기분이 묘했을 겁니다. 여인이 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저 족대를 준 사람이나 보한재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는 거기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겠지요. 나중에 남도에 체찰사로 내려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차군이 이웃 고을 사또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사또는 보한재의 오랜 친구였지요. 하지만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만나 옛이야기를 하여도 오직 차군 이야기만은 꺼내지 않았다 합니다."

"참으로 뭔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올시다. 고금을 통해 사랑에 집착하는 일이 어리석지 않은 것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퇴계는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까 두향을 바라보며 느꼈던 마음의 흔들림을 가만히 접고 있었다. 내가 두향을 아끼는 것은 그와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그녀의 육신이 아니며 더더구나 그녀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

마침내 선암에 다다랐다. 일행이 너럭바위에 둘러앉았을 때 토정은 말했다. "선암은 물속에 비친 바위가 무지개같이 영롱하다 하여 홍암(虹巖)이라고도 부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바위가 신선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부처로 보입니까, 아니면 무지개로 보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바위는 바위일 뿐 신선이 아니며, 부처도 무지개도 아닙니다. 바위의 형상이 신선을 닮았다는 것은 신선의 뜻과 기운을 취함이지, 말없는 바위에게 절하고 속된 욕망을 빌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위가 들어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세상사의 염원을 진짜로 들어주는 것은 돌이켜 자기 마음속밖에 없습니다. 저는 선(仙)과 암(巖)을 분별하는 일이 이 선암행(行)의 귀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오는 길에 두향이 단양사또의 선암시편을 읊고 싶다고 말하였는데, 이 너럭바위에서 청하면 좋을지요?"

"아아, 좋소이다." 구옹 이지번이 박수를 쳤다. 두향이 일어나 시를 읊는다. 이때 청하지 않았는데, 명월도 일어나 춤을 춘다. 이번엔 퇴계가 거문고를 품고 줄을 고른다.

 白石層層疊素氈(백석층층첩소전)
 神工不待巧磨鐫(신공부대교마전)
 從敎吼落雲門水(종교후락운문수)
 臺下寒開一鑑天(대하한개일감천)

 하얀 돌 겹겹, 흰 융단 쌓은 듯
 신선의 솜씨는 갈고 뚫는 기교를 기다리지 않았네
 운문사의 물길, 사자후처럼 떨어지게 하여
 거울하늘 하나를 누대 아래 서늘히 열었네

"과연 선암과 불암과 홍암을 모두 아우르는 묘창(妙唱)입니다. 신공(神工)이 나타남으로써 선암이 되었고, 사자후(사자 목소리 같은 부처의 가르침)가 등장함으로써 불암이 되었고, 거울하늘(鑑天)이 등장함으로써 홍암(무지개바위)이 되었습니다. 가슴속에 수만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뜬 것 같다는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저 거울하늘에서 적막의 파문을 일으키는 듯합니다. 사또는 유가(儒家)를 넘는 광활한 사유를 펼치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환락에는 쓸쓸한 그림자가…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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