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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환락에는 쓸쓸한 그림자가…(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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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6)

[千日野話]환락에는 쓸쓸한 그림자가…(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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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자못 의문의 칼이 매섭구료. 복숭아꽃 살구꽃의 사랑은 그저 제 몸의 욕망을 못 이겨 분방하게 터져나는 것이고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춘정(春情)을 푸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매화의 사랑은 상대가 지닌 고통을 견뎌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그 고결한 품격에 눈을 주고 마음을 주는 것이니 그 사랑이 내내 상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지요."

"매화도 홀로 보며 즐기고 싶어하고, 달빛도 매화가지 끝만 편애하는 것은, 그것 또한 하나의 사랑이기에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다른 것과 섞이는 것에 대한 혐질(嫌嫉ㆍ혐오와 질투)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런 것 같소이다. 어찌 그런 본능의 감정이 전혀 없겠습니까?"
"용재(성현ㆍ1439~1504)가 쓴 이야기책에 보면 충주의 관리로 와 있던 전목(全穆)이라는 사람의 일이 실려 있습니다. 전목은 그곳의 기생인 금란(金蘭)과 그야말로 금란지교(金蘭之交ㆍ굳기는 황금과 같고 향기는 난초와 같은 사귐)로 사랑하였는데 중앙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목은 금란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사내는 만나지 말고, 늘 조심하면서 살고 있거라. 내 기회가 되면 너를 다시 찾아와 데려가리라.' 그러자 금란은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월악산이 무너질지언정 제 마음속에 솟은 나으리의 모습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목은 나중에 금란이 충주 단월역(丹月驛)의 역장과 눈이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허어, 그랬더니요?"

"전목은 시를 지어 금란에게 보냈습니다."

듣자니 그대가 단월역장에게 일편단심이라 하더군
깊은 밤마다 역(驛)을 향해 날아가는가
언제 삼릉장(죄인을 추궁하는 세모 방망이) 들고 가서
약속했던 월악이 무너졌느냐 되물으리라
聞汝便憐丹月丞 夜深常向驛奔騰(문여편련단월승 야심상향역분등)
何時手執三稜杖 歸問心期月嶽崩(하시수집삼릉장 귀문심기월악붕)"

"허허, 점입가경입니다."

"그랬더니 금란이 답시를 보내왔습니다.

북쪽엔 전목이 있지만 남쪽에는 단월역장님도 계시네용
소녀의 마음은 날아다니는 구름같이 정처가 없으니껭
맹서가 깨지는 것처럼 산이 변한다면
월악산은 지금껏 여러 번 무너졌겠지롱

北有全君南有丞 妾心無定似雲騰(북유전군남유승 첩심무정사운등)
若將盟誓山如變 月嶽于今幾度崩(약장맹서산여변 월악우금기도붕)"

"허허허허. 공서는 정말 못 말릴 이야기꾼입니다."

퇴계가 파안대소했다.

"금란지계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니, 화접(花蝶)이 저마다 꾸는 꿈을 굳이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이 우스운 것입니다. 나비가 꽃을 버리고 떠나가듯 꽃 또한 다른 나비를 맞는 저 일을 어쩌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상대를 어쩌려고 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의 주제넘은 월경(越境)을 단속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사랑을 저런 냉소로만 대한다면 처음부터 사랑을 할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월악산도 솟아 있어야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니, 월악산을 쌓는 일은 공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일이겠지요."

"아아, 사또의 말씀이 가슴에 파고듭니다."

"고려 정지상이 남긴 '단월역'이란 시에도 각억야심운우산(却憶夜深雲雨散)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단월역에서 서월(西月)이란 기생과 실컷 술 마시고 놀다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깬 시인이 읊은 것입니다. 문득 어젯밤을 떠올리니, 그 좋던 운우지정은 다 사라져버렸네. 그렇게 탄식한 뒤 새벽 푸른 하늘에 외로운 달이 작은 누각의 서쪽에 서월(西月)로 걸려 있는 (碧空孤月小樓西) 풍경을 바라보며 까닭 없는 허탈감에 젖지요. 환락에는 늘 이런 쓸쓸한 그림자가 있게 마련인 듯합니다."(*운우지정은 선녀가 왕을 만나 즐긴 뒤 앞으로 그의 조운모우(朝雲暮雨)가 되어 늘 드리우고 적시며 사랑하겠다고 언약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어찌 꽃에게 사랑을 구하랴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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