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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어찌 꽃에게 사랑을 구하랴(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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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5)

[千日野話]어찌 꽃에게 사랑을 구하랴(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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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에게 다들 귀가 쏠리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분은 묘향산에 입산해 50년 수행을 하고 나와 송도의 오두막집에 기거하였습니다. 하루에 먹는 것이라고는 솔잎 몇 숟갈을 맑은 물에 탄 것뿐이었지요. 밤엔 잠을 자지 않고 계속 가부좌를 하고 앉아 수련을 했고 새벽이 되면 잠깐 뜨락을 거닐었습니다. 이분은 추명(推命ㆍ운명을 점치는 일)에 뛰어나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족집게처럼 알아맞혔다 합니다. 황정경(도가의 경전)을 9000번 읽었고 금강산 비로봉에 가서 1만번을 읽겠다며 다시 입산하였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산과 벼랑을 누비고 다녔는데 스님들이 산 부처처럼 공경했다 합니다. 나중에 유점사에서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고 들었습니다."

"솔잎 탄 물만 마신 김신선 또한 놀랍구료. 세상에는 참으로 기이한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냉천약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새끼를 쳐서 선암에 오를 때까지 꼬리를 물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따라 걷던 퇴계는 토정이 좌중의 화제를 몰고 가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두향이 토정에게 친밀하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야기에 매료된 눈빛과 흥미로운 대목마다 감탄사를 내놓는 그녀를 보면서, 자신은 왠지 소외되어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실 그 내용들이 단양의 궁핍과 정치의 부재를 꼬집고 있는 것인지라 이곳의 수령으로 참괴(慙愧)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에 무력감과 고독감을 동시에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사내와 젊은 여인 간에 오가는 대화는 참으로 자연스러웠고 때로 감미롭게도 느껴졌다. 이런 쓸쓸한 시선을 눈치챘을까. 문득 공서가 퇴계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산해군이 석문을 석미신월(石眉新月)이라 하였을 때, 운곡 원천석(1330~?)의 시(詩) '매초월(梅梢月ㆍ매화나뭇가지에 걸린 달)'이 생각났습니다. 그 매초월 첫 구절이 '일미신월보한경(一眉新月報寒更)'이었지요." 운곡은 고려 말 이방원(태종)의 스승으로 치악산에 숨어 살았는데 방원이 조선의 왕이 되어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 그렇구려. 산해군이 매화가 피어나는 차가운 시절의 풍경까지 석문에 새겼으니 더욱 멋진 작명을 한 셈입니다."

"바로 그러합니다."

"혹시 운곡의 그 시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예. 어린 시절부터 외던 것이라… 한번 읊어보리다."

눈썹 한 짝 같은 새 달이 추운 시각을 알리는구나
일미신월보한경(一眉新月報寒更)

매화 가지 끝을 유난히 좋아하니 흰 바탕이 더욱 환하다
편애매초소질명(偏愛梅梢素質明)

밤은 고요해지고 바람은 잠들고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야정풍정인정산(夜靜風停人正散)

그제야 차가운 빛을 서로 비추니 숨은 향기가 맑구나
냉광상조암청향(冷光相照暗香淸)"

퇴계가 감탄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 교묘하기가, 백운거사(이규보)의 대설갱장천점설 선춘투작일번춘(帶雪更粧千點雪 先春偸作一番春ㆍ백설을 띠처럼 둘러 1000송이 눈꽃을 다시 화장하여/봄에 앞서 한 차례의 봄을 훔쳐 만들다)과 어깨를 겨룰 만한 가창입니다."

공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득 생각나 여쭙는 말씀인데…. 매화를 사랑하는 일이 연애이겠습니까, 척애(隻愛ㆍ짝사랑)이겠습니까?"

농담이 섞인 듯한 갑작스러운 물음에 퇴계는 잠시 정적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사람과 꽃이 교유하는 일이기는 하나, 어찌 꽃에게 사람만큼 사랑해달라 하겠습니까. 그저 꽃도 반길 만한 지극한 경(敬)으로 그를 대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척애라 해야겠군요."

"하지만 꽃 또한 한 번 피어나면 하나의 생이니 일기일회(一機一會)의 귀한 인연을 얻은 것, 어찌 유정함이 없다 하겠습니까?"

"그러면 무르익은 춘흥에 겨운 도행(桃杏ㆍ복사꽃과 살구꽃)의 정사와, 저 봄을 미리 훔쳐 떨며 사랑하는 천점설(千點雪ㆍ1000송이의 설중매)의 열애가 다른 바는 무엇이온지요?"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물의 신선'이 꼽은 최고 물맛은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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