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신작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문학 수업시간,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은 '마리안의 일생(La Vie de Marianne)'을 한 줄씩 돌아가며 읽는다. 사랑에 빠진 고아 마리안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책이다. 주인공 '아델'이 특별히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한 대목을 읽다가 교사가 묻는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은 어떤 감정일까?" 문학소녀 '아델'은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막연하게 이 책에 끌린다. 그리고 운명처럼 15세 아델의 사랑이 시작된다.
어느 날 아델은 횡단보도 맞은 편에서 건너오는 파란머리의 엠마를 우연히 만난다. 그 강렬하고도 짧았던 스침은 이후 아델의 생활을 뒤흔드는 전조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아델은 레즈비언 클럽에서 엠마와 재회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곧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이들이 자라온 배경이나 환경, 성향은 정반대다. 아델은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존중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반면 아델은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실용적이고 안전한 삶을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있다.
이들이 사랑을 나눌 때의 풍경은 세상 어느 연인의 그것처럼 아름답다. 횡단보도에서의 강렬한 첫 만남은 두말할 것도 없고, 공원 벤치에서 첫 키스를 나눌 때 이들 위로 햇살은 반짝이고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린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파격적이고 뜨거운 정사 장면에서도 감독은 두 여성이 만들어내는 몸의 곡선을 고전주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유려하게 담아낸다. 첫 만남에서부터 사랑, 이별의 과정까지 시간의 순서대로 촬영한 덕분에 배우들의 감정 역시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은 아델과 엠마의 관계가 동성이라는 사실 조차 잊게 된다.
하지만 케시시 관계는 이들의 관계에 계급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첨가했다. 아델은 스파게티를 즐겨 먹고, 책을 읽으며, 돈을 벌어 생활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세계를 추구한다. 헤비메탈을 싫어하고 문학작품은 즐겨 읽지만,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알 정도의 교양은 갖추지 못한 아델의 꿈은 유치원 교사다. 반면 엠마의 세계는 다르다. 화이트 와인과 곁들여 먹는 싱싱한 굴의 맛을 알고, 생계보단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자아실현이 그녀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엠마와 아델이 각자의 부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차이가 도드라질수록 둘의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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