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1894년(고종 31) 7월부터 시작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그랬다. 이 개혁은 봉건사회제도의 청산이며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청의 종주권 부인, 사법권 독립, 신교육 령 등이 그랬고, 경제적으로는 화폐제도와 도량형이,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도 폐지, 적서차별 폐지, 조혼 금지, 과부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제 폐지 등이 이뤄졌으며, 의복에서도 복제 개혁이 단행되었다. 당시로서는 민주화에 첫발을 떼는, 현기증 날만큼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갑오년, '푸른 말의 해'에 이루어낸 일대 '혁명'이었다.
이 시도는 그해 10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무산되고 말았다. 의제개혁은 10년 후 갑오(甲午)년에 다시 추진되었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관리의 대례복은 흑단령(黑團領:깃이 둥근 흑색 포)으로 하고, 궁에 들어갈 때 통상복은 흑색 주의와 답호(?護:조선시대 관복이나 사대부들이 겉옷 위와 군복 위에 입은 소매 없는 옷)에 사모(紗帽: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쓴 모자)를 쓰고, 화자(靴子:신목이 장화처럼 길게 올라오는 전통신발)를 신도록 했다.
사서(士庶)인은 칠립(漆笠:옻칠을 한 흑갈색 갓)을 쓰도록 했다. 신분제도의 상징이었던 복잡한 의복제도가 간소화되고, 여기에 관리(官吏) 및 양반에서 평민까지 모두 흑색두루마기(周衣)를 웃옷으로 착용하게 함으로써, 웃옷(袍)착용이 어려웠던 서민들에게까지 두루마기가 통상예복이 되었다. 이때 전통복식을 고수하려는 보수파와 실용적이면서 간편한 옷으로 바꾸려는 개혁파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그간 국민들도 사회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겪으면서 간편하고 활동적인 복식의 필요성을 느꼈고, 동학 농민혁명을 계기로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없애고자 했던 바람이 의제개혁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실효를 볼 수 있었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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