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가 그냥 명사가 돼버린 것은 명사이긴 하지만 그 내면 속에 동사가 지닌 움직임이 한가득 소용돌이치고 있다. 삶은 한 글자로 되어있지만 그 속에 출렁이는 '살다'의 동사가 만들어내는 파란만장이 짧은 명사를 심오하게 만든다. 간단하지 않은 내면을 딱 한 글자로 뭉쳐버린 '삶'이란 외자의 단호함은 역설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잠이란 말은 '자다'를 그냥 웅크려버린 말이다. 잠은 하루의 낮 동안 깨어있는 육신을 잠깐 죽여 쉬게 하는 일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베푼 유일한 배려가 '잠'일지 모른다. 죽음은 잠과 같으니라. 활동하는 생명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것이다. 잠은 다시 네 육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죽음은 네 육신을 그만 쓰고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이니라. 그 예행연습을 거쳤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인간은 죽음 같은 잠에도 로맨스를 불어넣었다. 사랑을 하는 일을 같이 잠잔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잠드는 일은, 사실은 잠이 아니라 그 앞에 깨어있으면서 하는 일이 핵심이지만 슬그머니 잠에 붙여 우리는 그 일을 얼버무려 놓았다. 잠은 사랑이며 생명을 잉태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니, 죽음을 외삽시켜놓은 절대자와 새 삶을 만들어내는 창조를 겹쳐놓은 인간이 '잠' 한 글자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꿈이란 말은 '꾸다'에서 왔지만, '꾸다'는 다른 동사(살다, 죽다, 자다)보다 의존적이다. 그냥 '꾸다'로만 쓰지는 않는다. '난 어젯밤 아버지를 꾸었다'라고 하지 않는다. '꾸다'는 꿈이라는 말이 그 앞에 붙어 한 번 더 읊어줘야 한다(꿈꾸다). 꿈은 잠을 자는 동안 상영되는 영화인데, 의도하거나 초청한 것은 아니다. 그냥 스스로 찾아와 영사기를 돌리고 간다. 무슨 뜻인지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가 더 많다. 왜 그런 '스토리텔링'을 잠 속에서 펼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은 잠 속의 꿈을 빌려, 깨어있는 동안에도 '꿈꾸다'라는 개념을 확장해 쓰기 시작했다. 그 꿈은 앞으로 무엇인가를 하거나 이루겠다는 의지나 의욕을 품는 것을 가리킨다. 잠 잘 때의 꿈과는 전혀 다른 일인 데도, 우린 별 갈등없이 망(望)자 붙는 여러 가지의 동사(희망,소망,갈망,대망,야망)들을 꿈이라는 말 속에 포함시킨다. 작은 죽음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관은 신이 만들어준 것이고, 삶 속에 눈 뜬 채로 상영되는 미래공상과학 영화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둘 다 꿈이지만, 앞의 꿈이 이뤄지면 그것은 선몽일 뿐이고, 뒤의 꿈이 이뤄지면 그것은 성취나 성공이다.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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