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에 나오는 '짚강아지(芻狗)'를 보면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추구는 제사에 쓰기 위해 만든 물건이지만, 제사가 끝난 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무심하게 대한다. 그래서 노자는 "하늘과 땅에는 인(仁)이란 게 없으니, 세상 만물을 추구같이 여기며, 성인 또한 인(仁)이란 게 없으니, 백성을 추구같이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而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고 말했다. 이것은 공자의 핵심논지를 비판하는 돌직구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문제를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저지르는 오류를 바로잡는 냉철한 사유이기도 하다. 하늘이 착한 것을 권하는가? 땅이 인간의 도덕을 감시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인이 착하지 않은 일을 보고 분노할까? 안 한다. 스스로 천지처럼 완전한 경지에 든 인간이, 왜 굳이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의 잘잘못을 따지겠는가? 하늘이 인간을 낼 때, 그때 기울였던 그것이 짚강아지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맞먹는다. 성인이 뭇인간을 대할 때도 인간을 교화시키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찾아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이 짚강아지와 등신이 같은 것이라면, 쓸모 없는 것 혹은 관심 기울일 가치가 없는 것에 해당한다.
등신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사람 구실을 못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이 말을 함축한 것이다. 사실 이 뜻에 잘 어울리는 것이라면 '뒤웅신'이 더 낫다. 뒤웅신은 뒤웅박으로 만든 신이다. 뒤웅박은 박에다 구멍을 뚫어 속을 파내고 말린 것인데, 이것을 신발처럼 신었으니 제대로 걸을 리 없고 미련둔탱이처럼 뒤뚱거릴 수밖에 없다. 요즘 친구들이 가끔 등신을 '뒤웅신'이라고 하니, 이건 소 뒷발에 쥐 잡은 격이다.
나는 어린 시절, '소'같다는 소리와 함께 등신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나보다 어린 동네친구한테 두들겨 맞고 절뚝거리고 들어온 날, 어머니는 팔뚝으로 내 등을 밀어치며 "이런 등씨이 축구(畜狗)가턴 넘"이라고 윽박지르며 함께 울었다. 자전거를 멀쩡히 서 있는 트럭 뒷꽁무니에 들이받은 날도 같은 소릴 들었다. 축구는 개이고 등신은 인간 안된 무엇이니, 둘 다 사람값 못하는 존재다. 그 천하 등신이 살아나 엄벙덤벙 오래까지 밥 먹고 살고는 있으니, 등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에게라도 등신이란 소릴 해선 안되는 사람이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