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 6월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아내가 신장을 주고, 아들이 간을 줬다"며 "신체의 일부를 가족과 공유하게 됐다는 것이 설명하기 힘든 관념으로 다가왔다"고 설명한다. 이제 그는 완전한 회복을 꿈꾼다.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하는 삶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그는 올 겨울엔 가족과 함께 여행할 계획이다. 또 봄이 와서 하루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세번째 시집 '물방울 무덤'이 '사라지는 것의 애도'라면 네번째 시집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 듯 사라지는 것에 대한 순환성을 더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시를 통해 삶을 어떻게 지탱해 내는 지를 배우게 된다.
"밭모퉁이 빈터에 달포전부터 베르니카 은하가 떴다. 봄까치꽃이라고도 한다. 베르니카 은하에서 연보랏빛 통신이 방금 도착했다. 워낙 미약하여서 하마트면 놓칠 뻔 했다. 인근 광대나물 은하까지는 불과 몇십미터이지만, 꽃들에겐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거리일 터.(중략) 어느 봄날엔가, 당신이 까닭없이 서러워져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들에게 그렁그렁 눈물 어린 눈길을 주었던가. 그래선지 오늘 내가 거기서 왠지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 슬픔도 저리 환하다."('4월' 중 일부)
세상은 언제나 생멸을 반복하고, 인간은 그 궤도에 잠시 올라탔다 내린다. 어느 인생이든 희노애락이 공존한다. 그래서 100% 순도 높은 행복만을 기대할 순 없다.
여기서 '너'는 소멸 혹은 소멸 직전에 나에게 뼈저린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다. 너에게서 도망치 듯 멀리 하려는 것은 언제나 알고 보면 마음 속의 괴로움이거나 집착일 수 있다.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포용은 엄원태의 시가 지닌 고요하고도 적막한 힘이다.
"마음을 연 어미가/ 제 새끼 받아들여 핥아주고 젖을 물리듯/가슴 깊이 흐르는 강 같은 쓸쓸함으로/징한 새끼 같은 삶을 받아들이곤 한다네."(후스루흐 중 일부)
그토록 절절한 삶은 '언제나 죽음 지척의 일'(주저앉은 상엿집)이며 '한바탕 부유'(공중무덤)이다. 또한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 저녁 하늘 위 무심한 붉은 구름. 말없이 돌아가는 죽지 흰새 몇, 그 아래 조용히 팔을 거두어 들이는 잎 큰 후박나무들. 저 홀로 푸르러 어두워가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다만 흘러가는 것들)에서의 쓸쓸함, 그 견딤의 과정이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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