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였던 그녀는 태종 이세민 사후 비구니가 되었는데, 절에서 만난 고종의 눈에 들어 황제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교묘한 술책으로 왕황후와 소숙비를 몰아내고 654년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천성이 잔인하여 둘의 다리를 자르고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였다. 고종의 외삼촌이자 재상인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무고하여 귀양지에서 죽게 만들었다. 장남과 차남을 황태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죽였으며, 셋째는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50일만에 쫓겨났다. 모든 실권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690년 이씨 왕족과 귀족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주 왕조를 새로이 창건했다.
그녀는 내준신, 색원례, 주홍 같은 혹리(酷吏)를 중용하여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내준신은 억울한 사건을 날조하고 갖가지 혹형을 개발하여 자백을 받아내기로 악명이 높았다. 나직경이라는 모함 지침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색원례는 만주족으로 한 번 사건을 수사하면 수백 수천 명을 연루시켜 처벌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말년에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신임하였다. 일설에는 3천 명의 남자를 주변에 거느렸다고 한다. 무씨 일족을 중용하여 조카인 무승사, 무삼사의 권세는 재상을 능가하였다. 특히 무삼사는 성격이 잔인하고 아부에 능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녀는 황후에 오르고 새 왕조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많은 종친과 귀족을 숙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신흥 가문이나 관료가 중앙정계에 등장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와 지배세력의 변화로 이어졌다. 전통적 귀족세력과 신흥 관료집단이 공존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탄생하였다.
그녀는 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광초현재(廣招賢才)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적인걸, 장간지, 요숭, 송경 같은 준재가 즐비하였다.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스스로 추천하는 자거,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는 무거, 특별한 재능인을 뽑는 제과 등을 신설하여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였다. 민생에 각별히 신경을 써 토지매매를 금지하여 호족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도망간 농민들이 귀농토록 각종 구제조치를 실시하였다.
특히 국로인 재상 적인걸을 신임하여 조정 대소사는 물론 자신의 후계 문제까지 상의하였다. 자신의 친정인 무씨 집안이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다시 불러들였다. 적인걸이 죽자 "조정이 텅 빈 것 같다"며 노신의 경륜과 충성심을 아쉬워했다.
그녀는 기개와 권모로 천하의 대세를 바꾸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정사를 스스로 펴서 명찰, 선단하였기에 당시의 영현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섬기다"라고 평하였다. 그녀는 임종 시 자신의 묘비에 아무런 문자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소위 무자비(無字碑)다. 사후 자신에 대한 격렬한 비난을 예상했던 것일까.
박 종 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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