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소설가 김영현이 칩거중인 양평집은 여느 살림집과 달리 작은 연구소같다. 집은 골짜기 틈바구니에 일자형으로 배치돼 앞과 뒤가 꽉 막혀 있다. 겨우 서향만이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정도다. 작업실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작업실 안에선 작은 창문 너머로 시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이 기이하다. 주인은 집안으로 외부를 끌어넣으려 하지 않고, 앞산과 들판은 아랑곳 없이 온 힘을 다해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쓰는 형국이다.
"다 버리고 왔는데도 한동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치유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절망하면 변절한다는 걸 깨달았다."
꿈꾸기를 시작할 즈음 그는 끔찍한 사건 하나와 마주쳤다. 마을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의 유일한 식구인 개 세마리를 누군가 엽총으로 쏘아 죽인 것이다. 아무리 거부해도 앞산이 집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 사건은 "운명처럼 다가와" 가슴놀이에 사무쳤다.
"할머니의 절망이 끔찍하고, 생명에 가해진 폭력이 끔찍하다. 이유 없는 분노와 적대가 판친다. 그리고 절망한다. 세상은 떠나올 수 있는게 아니다. 어디래도 다 세상의 한 복판. 살면 당연히 등을 떠미는게 있다. 버린다고 외면할 수 없다. 정신적 암흑기다. 적은 우리 안에 있다.작가가 어찌 세상을 위로하랴. 그저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으면 족하리라."
실천문학 대표, 한국작가회의 부회장 등 문단 활동을 접고 칩거와 걷기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 왔던 경험에서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오는 7일부터 아시아경제 신문 연재소설 '짐승들의 사생활'로 등졌던 세상과 다시 소통을 시작한다. 이번 작업을 통해 '슬픔의 망명정부'에 사는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가는 과정을 보여줄 작정이다.
"우리 망명정부는 슬픔의 왕국이야. 슬픔이 없는 자는 들어올 수가 없어." "...(중략)..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어떠한 갈등이나 분쟁에도 관여치 않을 것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을 것이며, 세계 평화에도 전혀 기여치 않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즉 '짐승들의 사생활'은 관여하지 않고, 구제하지 않고, 기여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연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피해자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켜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우리의 숙제는 청산과 극복, 전망을 동시에 해야한다는데 있다. 누가 해 주겠나 ? 우리가 해야한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이념에서 인간으로 옮겨가야 답이 나온다. 그건 새로운 경험일 수 있다. 그 경험의 연대에 앞서 상처를 돌아볼 깊이와 위엄이 갖춰져야 이긴다."
'짐승들의 사생활' 연재 활동에는 박건웅 화백이 함께 한다. 박화백은 '노근리 이야기1,ㆍ2부', '삽질의 시대', '꽃' 등 근현대사를 담은 만화, 삽화 작업을 주로 해왔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도 출간될 정도로 유명하다. 삽화를 담당한 박 화백은 "우리 시대가 지닌 문제의식과 이념보다 따뜻하고 정겨운 삶을 그려내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보였다. 박화백의 말에 김영현이 손을 내민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지자 김영현이 말한다.
"망명정부로 다 모여라. 신명나게 한바탕 놀자."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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