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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빈곤의 경제학과 경제학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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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의철 기자]빈곤의 사전적 의미는 가난해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빈곤ㆍ인간 개발계획'은 10개의 평가항목을 제시하고 이 가운데 3가지 이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절대적' 빈곤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등록돼 있는지, 가족 가운데 영양실조에 빠진 이들이 있는지, 집에 전기가 공급되는지, 도보로 30분 이내 거리에서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는지 등이 기준이다. 이보다 더 간편한 방법도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은 '1일 생계비 1달러(One dollar, a day)'다. 이는 세계은행이 정한 절대 빈곤층의 기준이다. 전 세계적으로 10억명 정도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반면 '1%의 부자와 99%의 가난한 자'를 가를 때 쓰는 '빈곤'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경제학적으로는 분배의 문제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얀 펜(J. Pen)은 '소득분배'라는 책에서 한 사회의 소득불평등을 가상의 가장행렬을 통해 설명한다. 한 사회 구성원이 모두 참가하는 한 시간짜리 가장행렬이 있는데 소득에 따라 참가순서가 정해진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땅속에 파묻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나타난다. 소득이 마이너스라는 뜻이다.

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키가 몇 센티에 불과한 개미 같은 인간들이 나오고 한참 뒤에 키가 1m가 채 안 되는 난쟁이들이 등장한다. 난쟁이들의 행렬은 30분 동안 지속된다.

사회의 평균소득에 해당하는 키 170㎝의 사람들은 행렬을 시작한 지 48분 후에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에 등장하는 이들의 키는 비정상적으로 커진다. 50분이 넘어가면 2m가 넘는 키다리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수십 초를 남겨 놓고는 초거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키는 너무 커서 얼굴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얀의 미덕은 로렌츠곡선이나 지니계수보다 훨씬 쉽게 '불평등'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화두는 '1%와 99%'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구호가 그렇고,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이 역시 불평등이나 격차를 줄이자는 주장이다. 가진 자의 나눔과 베풂, 상생과 이익공유가 구체적인 방법론인데 주체는 대기업일 수도 있고 부자일 수도 있겠다. 말인즉슨 하나도 틀린 것 없다. 지극히 옳은 방향이다. 오히려 왜 이리 늦게 이슈화가 됐을까 하는 만시지탄이 있다.

그러나 빈부격차, 또는 소득의 불평등, 나아가 불균등 발전은 그 자체로선 해소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은 월급을 준다 해도 불평등은 없어지지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서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다고 해서 과연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지금 정치권에서 난무하고 있는 '1%와 99%'라는 구호는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사기꾼이다. 얀의 가장행렬에서 얼굴이 구름 위로 솟은 이의 몸뚱이를 잘라서 키를 맞춘다고 해서 난쟁이들의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거인들의 키를 끌어내리는 게 아니다. 물구나무선 이들이나 키가 1m도 안 되는 이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정상적인 성장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거인들이 난쟁이들의 몫을 빼앗았다고 선전하는 것, 이에 편승해서 분노를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빈곤의 경제학이 경제학의 빈곤으로까지 가선 곤란하다. '배고픈 것'과 '배 아픈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 정도는 우리 사회가 가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의철 기자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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