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창업주DNA]대륙 향한 원대한 꿈…국내 최초 '글로벌시대' 열다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재계 100년-미래경영3.0 창업주DNA서 찾는다
<19>삼양사 김연수 회장

1935년 경성방직 만주 진출·삼수사 설립 新영농 도입
식품·섬유사업 등 제조업 육성 국가경제 부흥 선구자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나는 평소의 지론이 우리나라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선 기간산업의 개발이 시급하고, 그밖에도 더욱 시급한 여러가지 경제적인 난제들이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다름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경제계에도 윤리의식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나라의 육성이란 도저히 바랄 수 없다는 거요."(1961년 한국경제협의회 초대 회장 취임 인터뷰에서)

삼양사 창업주 수당(秀堂) 김연수(1896~1979) 회장은 평생 기업인인 동시에 선비의 삶을 살았다.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전쟁 등 우리나라 근대화를 고스란히 겪은 수당은 처음 회사를 맡은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순간까지 '기업은 봉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인생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기업이 존재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했고 회사 손익보다는 사람을 위하는 인간존중의 정신을 강조했다.

◆삼수사 설립…근대적 영농법 소개=수당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현 삼양사의 전신 '삼수사(三水社)'를 1924년 설립해 자신이 구상했던 바를 실행에 옮긴다. 이 회사는 농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개설하는 등 근대적인 영농법을 도입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수당이 영농개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우리나라 농촌의 피폐한 모습을 직접 보며, 자신이 직접 농촌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농촌 파산자수는 700여만명에 달했고 만주땅으로 이주하는 농민도 연간 20만명에 달했다.

삼수사를 세우기 몇년 전, 만주일대를 돌아보며 제대로 개발된 공업단지와 광활한 농토를 돌아본 수당은 농토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동시에 공업화 역시 시급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만주를 다녀온 수당은 곧바로 농촌을 직접 돌아다니며 모범농촌만들기 운동 등을 설파하고 다녔다. 이러한 수당의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일 때쯤, 삼수사를 설립하며 기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창업 후 8년째인 1931년, 삼수사는 삼양사로 이름을 바꾼다.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진출=만주는 수당이 젊은 시절 자신의 인생목표를 세우게 한 곳이다. 20대 시절 만주를 시찰하며 "넓은 만주벌을 농장으로 개간하면 토지 없는 우리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공업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라며 만주진출을 항시 염두에 뒀다.

회사 설립 이후 9개의 농장을 새로 만들며 경영자로서의 수완을 보여준 수당은 자신의 회사는 물론 실질 경영을 맡은 경성방직의 새로운 시장개척을 위해 1935년 만주로 진출했다.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진출이었던 셈이다.


경성방직의 주요 제품들을 만주 일대에 소개한 수당은, 경성방직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펑톈과 길림성 일대에 자신의 회사인 삼양사 봉천사무소를 이듬해 열었다. 직원들을 통해 5개월간의 사전조사를 끝낸 뒤였다.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수당은 만주 지역에 처음으로 천일농장을 지었다. 1941년까지 매해 새로 땅을 개간한 결과 우리 농민 600여 세대가 정착할 수 있었고 수당의 농장이 소작인들에게 조건이 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곳은 만주 일대 동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남만방적의 설립은 삼양사 만주진출의 정점이었다. 남만방적은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에 공장을 지은 회사로 당시 수당은 만주는 물론 향후 중국, 연해주, 러시아 대륙까지 진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확장시켰다.

당시 발발한 중일전쟁 역시 수당에게는 중요한 기회였다. 농장개간을 같이 하던 임직원들은 "전쟁중이라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수당은 "동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만주에 새로 방적공장을 짓더라도 노동력과 판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수당의 예상과는 달리 공장 설립 초기에는 일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국땅에 온 조선 동포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공장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수당은 생산설비를 비롯해 기숙사, 강당, 식당, 사택, 의료시설까지 모조리 지어놨었다. 공장 내에 학교를 짓기로 했다. 당시 만주에 이민 온 동포들이 학구열이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12시간에 달하던 여공들의 근무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는 동시에 공부시간 4시간을 따로 주기도 했다.


◆섬유서 새 희망 찾다=1945년 해방은 수당에게 시련이었다. 땀 흘려 일군 사업장을 송두리째 잃었고 젊은 시절을 함께 한 만주에서도 철수해야 했다.

그는 한국전쟁 후 땅과 염전, 농장을 관리하는 삼양사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제조업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식품과 섬유산업을 점찍었다. 이후 시장조사를 하며 제당과 한천 제조를 최종 결정했다. 이후 1960년대로 넘어서면서 젊은 시절 기업인으로 발을 내디뎠던 섬유산업을 다시 떠올렸고 전주방적을 인수하며 사세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삼양사의 기틀을 만든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수당은 울산 제당공장 옆에 화섬공장을 세우려 했다. 그러자 수당의 고향지역인 전라북도와 전주시 유지들이 찾아와 "전주에 공장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부지까지 마련한 상태였지만 수당은 "기업의 사명은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며 낙후된 고향지역을 살리는 심정으로 전주지역에 공장을 건립했다.



최대열 기자 dychoi@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어른들 싸움에도 대박 터진 뉴진스…신곡 '버블검' 500만뷰 돌파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국내이슈

  • 공습에 숨진 엄마 배에서 나온 기적의 아기…결국 숨졌다 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난민 12명 뉴욕 한복판서 집단 난투극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해외이슈

  • 고개 숙인 황선홍의 작심발언 "책임은 감독에게" [포토] '벌써 여름?'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PICK

  • 1억 넘는 日도요타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대북 제재 우회" 지적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