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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한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 솔선수범 한결같은 '신사상인(紳士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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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100년-미래경영3.0 창업주DNA서 찾는다
<17>유한양행 유일한 회장

국민건강 위해 창업 '기업 통한 봉사' 실천
'유한양행 주인은 사회' 1936년 기업공개
유한공고 등 설립 교육사업 통해 이윤환원
[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기업을 운영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윤 추구라는 태생적 이유와, 사회로부터 발생한 후천적 책임은 어떤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적절한가. 저명한 학자 혹은 기업인으로부터 조언을 얻을 수 있겠으나, 유일한 박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정답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한국 기업사의 기념비적 인물 유일한. 점잖은 신사상인(紳士商人)이란 뜻의 '신상'이라 불리던 그는 '단순한 장사치가 아닌 뜻있는 상인'을 꿈꿨다. 그리고 이를 실천해 낸 보기 드문 기업인이었다.

상인 집안에서 물려받은 뛰어난 장사능력

유 박사의 부친 유기연(柳基淵) 공(公)은 평양에 점포를 내고 농산물, 건어물 등을 파는 잡화상을 운영했다. 선친의 상인기질을 물려받은 유 박사는 미국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장사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비단, 손수건, 카페트 등을 수입해 미국 현지에 팔았다. 중국 음식점이 성행한 점에 착안해 숙주나물 장사를 시작했고, '라초이(La Choy Co.)'라는 식품회사를 운영했다. 중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사업가적 수완을 타지에서도 여지없이 발휘한 것이다.
"기업을 통한 봉사, 이것이 나의 기업정신이다"

유 박사의 미주 독립운동 동반자였던 서재필 박사는 귀국하는 유 박사에게 작은 선물을 준다. 서 박사의 영애가 직접 만든 '버들표 목각품'이었다. 그것은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라'라는 의미였고, 훗날 '버들표 유한양행'의 상징이 됐다.

미국 사업을 접고 영구귀국 한 유 박사는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국민들의 가난에 찌든 삶을 목격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 여겼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초빙을 거절하고 기업인의 길을 선택한다. 제대로 된 교육사업을 하기 위해 우선 충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기업인으로서 교육사업을 위한 기반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선진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유 박사는 보람된 일로 생각했다.

이에 유 박사는 1926년 종로2가에 제약회사를 창립했다. 자신의 성을 따 '유(柳)'자를 쓰고, 한국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한(韓)'자를 써 사명을 유한양행이라 지었다.

◆정직과 신뢰로 '좋은 제품'을 만들라

유 박사는 우리 동포의 건강ㆍ보건의 증진을 위해 기업을 경영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라 사랑의 길이라 확신했다. 이런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체 배척했다.

유한양행이 만주를 비롯해 중국 동북부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판매 활동을 하던 1930년대, 시장조사를 하던 한 간부가 헤로인과 모르핀을 판매하면 큰 이익을 올릴 것이라 보고했다.

이에 유 박사는 "나더러 아편 장사를 하란 말인가. 자네는 도대체 지금까지 우리 회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당장 사표를 쓰게"라며 크게 화를 냈다. 단기적인 이익을 주지 않더라도 '좋은 제품'을 팔아야 한다는 유 박사의 가치관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졌다.

유한양행은 '나의 기업'이 아니다.

1936년 유일한 박사는 기업공개를 결정한다. 당시로선 매우 획기적인 결정으로 우리나라 두 번째 기업공개였다. 유 박사를 포함, 종업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로 등재됐다.

상당수 주식을 종업원에게 공로주 형태로 배분한 것이다. 유 박사가 지닌 '기업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종업원의 소유'라는 신념의 결실이었고, 훗날 국내기업 최초 종업원지주제 시행의 단초가 된다.

경영이념에 내세웠던 '기업은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신념을 전문경영인 제도 도입으로 실천했는데,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철학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는 생전에 가지고 있던 유한양행 총 주식 40%를 각종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등 이윤의 사회환원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이윤추구는 기업성장의 선행조건이지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교육사업으로 기업이윤 환원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인 1954년. 그는 염원하던 교육사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윤의 사회환원을 실천한다. 사재를 들여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고, 60년에는 한국직업학원, 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 66년 유한중학교를 설립했다.

유 박사는 시간만 나면 유한공고를 찾아, 어린 학생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훌륭한 사람이 돼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별세하기 몇 달 전까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학교를 둘러봤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학생들과 그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애정이 컸던 것이다.

◆기업의 주인은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

유 박사는 사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완성했다. 유언장에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와 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 유한동산 조성용 토지 5000평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고 명시했다.

사후까지 변함없는 사회공익사업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재단 설립 목적 자체가 항구적 사회공익사업을 펼쳐가기 위한 것인 만큼, 유언장은 유 박사의 신념이 응축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는 기업을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업의 주인은 사회이고 기업가는 이를 맡아 관리하는 것뿐이라 했다. '청지기' 정신을 실현한 사람이라 평가 받는 이유다. 청지기는 일과 재산을 맡아 관리할 뿐이며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노력해야 하는 일꾼이다.

그는 재물의 소유보다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일의 의미는 인간적 가치를 높여 주는 데 있다고 믿었다. 일다운 일을 하면 돈은 따르는 법이며, 일은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에 그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수입은 적고 돈벌이는 잘 안 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한 봉사의 뜻을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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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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