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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⑦신립, 왜란만 없었으면 조선 최고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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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탄금대 전경(사진=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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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충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에 남한강 상류와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요충지에 자리잡은 탄금대(彈琴臺). 원래는 가야금의 주인공인 악사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라 이름도 탄금대라 불리지만 조선시대 이후 탄금대는 우륵선생보다는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더 강하게 인식돼있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약 2주만에 벌어진 탄금대 전투는 비록 처참한 패배로 끝났지만 조선과 일본 양국 정규군이 야전에서 맞붙은, 임진왜란 전체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물고 중요한 회전이다. 이 전투를 이끌었던 장수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란 칭호가 붙어있던 신립(申砬) 장군이었다.
신립장군 영정(사진=위키백과)

신립장군 영정(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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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장군은 본래 어릴 때부터 글보다는 무예를 좋아했다 전해지며 22세 때인 1567년 무과에 급제해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가있을 때 당대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양 목사는 신 장군에게 거친 성격을 고치라고 여러차례 지적했다 알려져있는데 나중에도 이 거친 성격으로 인해 부하들을 너무 험하게 다루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3년 신 장군이 온성부사로 북방에 있을 때 여진족의 지도자였던 니탕개(尼湯介)가 난을 일으켜 3만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동북방면에 쳐들어왔다. 여기서 신 장군은 크게 활약했다. 수차 전투에서 연승하면서 조정은 이듬해 3월에 신 장군을 함경도북병사로 임명했다. 그가 조선최고 명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평시에도 기병을 정병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아주 강인한 장수였다고 알려져있다.

니탕개의 난은 조선 건국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적이 쳐들어온 대전이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대대로 추앙받았을 터였다. 실제로 1592년 임진왜란 이전까지 그의 명성은 조선 내에서 절대적이었다. 더구나 선조가 장차 세자로 세우려했던 왕자 신성군의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도 적지 않았고 선조의 신뢰도 매우 두터웠다.
하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이 조선 최고의 명장은 너무 허무하리만큼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조선군은 완전히 전멸했고 그의 위명을 믿고 피난가지 않았던 충주성 주민들도 전쟁에 희생되고 만다.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에서는 당시 북상 중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군과 맞서 산악지형인 조령에서 맞붙지 않고 평야지대인 탄금대에서 맞붙은 것은 신 장군의 전략적 판단 실책으로 보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신 장군이 조령을 택하지 않고 탄금대를 결전장소로 택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시 일본군은 1군만 북진하던 것이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3군이 비슷한 속도로 이동 중이었고 한 군단 하나가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전체 전력의 2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다. 결국 조령에 들어가 막았다면 고니시의 1군은 효과적으로 막았다고 해도 2군과 3군이 우회하거나 조령의 길목을 차단한 채 북상했다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

또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보병 운용 방식은 조선군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전술이었다. 조선군이 이전에 싸운 적군은 대부분 여진족 군대로 주로 기병대였고 여기에 맞춰 조선군도 기병전술에 능했으며 신립이 이끌고 갔던 병력 대부분도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에비해 일본군은 장창병과 조총병을 동시 운용하는 보병전법이 뛰어났고 150년에 걸친 전국시대 동안 단련된 병사들이라 개별 전투능력이나 무장도가 조선군에 비해 훨씬 좋았다.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기고 있었기에 더욱 이기기 힘들었다. 각지에서 패전이 날아들고 많은 벼슬아치들과 장수들이 도주하는 상황에 목숨을 걸고 오합지졸인 병사들을 데리고 내려가겠다는 것 자체가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애초에 승전을 생각하기보다는 후방 병력이 결집될 시간이나마 벌기 위한 전투임을 알고서도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목숨걸고 나가싸워 같이 전사한 김여물(金汝物) 장군과의 끈끈한 인연은 그의 아들대에도 이어진다. 신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과 김 장군의 아들 김류가 훗날 인조반정의 중요 공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신립은 영의정이자 평양부원군으로 추존된다.

민간에서는 그의 패전을 대단히 안타깝게 여겼는지 탄금대 전투와 관련한 전설까지 만들어졌다. 이 전설에 따르면 신 장군이 무과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가고 있는 중 어느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큰 기와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처녀 한명이 혼자 우는 것을 발견했다. 사연을 물어보니 본래 이 집은 수십명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사는 큰 집이었으나 어느날 요괴가 나타나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먹었고 그 탓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요괴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며 오늘밤 요괴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슬퍼서 운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신 장군은 처녀를 안심시키고 병풍 뒤에 숨어 요괴가 나타나자 바로 칼로 요괴의 목을 쳐 처녀를 구하고 처녀의 복수를 해줬다. 이에 처녀가 감사해 하면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해 달라고 했으나 그는 거절하며 떠났고 처녀는 절망해 신 장군이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그 후 탄금대 전투 당시 이 처녀가 신 장군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에 진을 치면 크게 이길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신 장군 그 말에 따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적을 맞이했으나 대패했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남송의 장수 악비에게도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아마 신 장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백성들이 악비 전설에 주인공을 바꿔 이야기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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