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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고종후와 400 결사대

최종수정 2017.08.09 08:30 기사입력 2017.08.09 08:30

이상훈
파도는 높고 거칠었다. 남쪽으로 들이닥친 파도는 순식간에 조선 내륙으로 밀려들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향해 출발한 일본군은 14일 부산을 공격했다. 4월 24일에는 상주가 함락되었다. 10일 만에 경상도 전역이 일본군의 침략에 무너졌다. 소백산맥을 넘은 일본군은 4월 28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을 패배시키고, 5월 2일에는 한양 도성마저 함락시켰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1592년 4월 22일,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장으로서 거병했다. 의병은 조선 전역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흩어졌던 백성들은 의병의 기치 아래 다시 모여들었다. 의병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일본군의 보급로와 거점들은 위협받게 되었다.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도(各道)와 각읍(各邑)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다. 고경명은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와 합세하여 충청도 금산(錦山)의 일본군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1592년 7월 10일의 일이다.

 금산 전투에는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도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고인후가 전사하고, 고종후만 살아남았다. 고종후는 아버지와 아우를 동시에 잃고 비통했다. 1592년 8월, 고종후는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찾아 광주로 모셔왔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흩어진 주검을 수습하고 금산 전장(戰場)에서 조문을 작성하여 제를 올렸다. 소 달구지에 주검들을 싣고 광주로 돌아오니, 통곡과 복수의 기운이 넘쳐났다.

 고종후는 장례가 끝나자 의병에 종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아버지와 아우가 모두 죽은 상황에서 장남마저 죽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충효를 다하는 것과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불효 사이에서 갈등했다. 고심하던 고종후는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결국 어머니는 고종후의 결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종후는 갑주를 입고 인근 고을의 자제들을 설득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했다. 오래지 않아 향병(鄕兵) 200여 명이 모였다.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이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했다. 비통함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왜적을 쳐서 원수를 갚자고 설득했다.

 1592년 10월 1일, 드디어 고종후는 복수(復讐)할 사람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아버지 고경명과 아우 김인후가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지 석 달만이었다. 고종후는 상복을 입고 금산 전투에서 죽은 군사들의 신위(神位)를 앞세웠다. 일본군에게 부모ㆍ형제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 고경명 부대의 잔존병들을 거두어 별군(別軍)으로 편성했다. 조수준을 계원장(繼援將), 해정을 유격장(遊擊將), 김인혼과 고경신 등을 군관(軍官)으로 삼았다. 오빈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오유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고종후는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불렀다. 고종후와 복수의병대의 탄생 순간이었다.

 1592년 12월, 고종후는 전라도 광주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도내(道內)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냈다. 일본군에게 부모ㆍ형제를 잃은 자들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고종후 부대의 군호는 '복수(復讐)'였다. 격문의 끝에는 고종후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이름 석 자를 혈서로 남겼다. 고종후의 격문에 따라 모여든 이가 1000여 명에 달했다.

 이 무렵 경상도에서는 진주성 전투가 한창이었다. 1592년 10월,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 2만여 명과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 3800명의 대결이었다.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지속된 일본군의 공격은 실패했다. 바로 1차 진주성 전투(진주 대첩)다. 흔히 이순신의 한산도 전투ㆍ권율의 행주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2월 27일, 3월 10일, 4월 11일, 5월 1일, 5월 20일에 거듭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다. 1차 진주성 전투 실패에 따른 자존심 회복이 문제였다. 또한 진주는 경상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였다. 경상도에서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1593년 여름, 일본군 거의 대부분이 진주성을 집중 공격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성을 포기하라는 명나라 군대의 권고도 있었지만, 진주성을 지키던 이들은 거부했다. 조선군 일부가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입성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부대들이 입성을 거부했다. 절대적 병력 차이를 인식하고 구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의병장 고종후
 이 때 고종후는 움직였다. 복수의병대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향했다. 남해안을 따라 광양을 지나 섬진강을 건넜다. 경상도 하동땅으로 진입했다. 경상도에 들어선 고종후는 군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전날 금산의 패배를 생각하면 떨리는 치욕에 창자는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쥐어뜯는 것 같다. 앉아 있으면 얼빠진 사람이 되고 집을 나서면 갈 곳을 잊어버렸다. 적을 낱낱이 베어 가솔(家率)을 지키고 산하(山河)를 이어갈 수 있다면, 설령 이 몸이 적의 칼날에 산산조각이 난들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고종후는 진주가 남방의 거점으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지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약 진주가 무너진다면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하게 되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했다.

 "우리 군대는 의(義)를 위해 일어났으니 오직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오늘 죽을 자는 나를 따라가고 내일 죽을 자는 향리(鄕里)로 돌아가 장차 있을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그러니 가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떠나도록 하라."

 고종후는 향촌 수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현재의 적정(敵情)을 알리고 후방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휘하 군사들을 다그치지 않고 마음대로 떠나도록 했다. 하지만 400여 명이 남았다. 그야말로 결사대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나는 군대였다. 고종후와 400 결사대는 상복을 입었다. 삼베에 '복수(復讐)'라는 군호를 새긴 머리띠를 둘렀다. 이들 행렬의 맨 앞에는 '복수토왜(復讐討倭)'라는 깃발이 나부꼈다.

 400 결사대는 어떻게 고종후를 따라 죽음에 나설 수 있었을까? 앞서 고종후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6편의 격문을 발송한 적이 있다. 격도내(檄道內), 재격도내(再檄道內), 통제사승도문(通諸寺僧徒文), 격제주(檄諸州), 통제주삼가문(通諸州三家文), 격도내서(檄道內書)가 그것이다.

 고종후는 격문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경험을 근거로 전황을 분석했다.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자를 '형제' 혹은 '동지'라 불렀다. 천민이나 승려를 포괄하면서 이들도 마찬가지로 형제나 동지라고 했다. 고종후 부대에는 가노(家奴)와 사노(寺奴)가 일찍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고종후는 스스로 낮추어 여러 계층을 받아들이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개인의 복수가 국가의 복수로 이어진다는 대의명분도 주효했다.

 1593년 6월 15일, 일본군 9만여 명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6월 19일, 일본군이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6월 20일, 진주성 주위의 해자(垓字)를 흙으로 메우기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어 6월 29일까지 지속됐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진주성에 집결한 조선의 군사들은 60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10배가 훌쩍 넘는 대군이었다.

 진주성 내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전멸했다. 조선측 기록으로 6만여 명, 일본측 기록으로는 2만여 명이다. 어느 기록을 따르건 수만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종후의 400 결사대도 모두 전사했다. 고종후는 전세가 기울자 김천일(金千鎰)과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북향 재배한 후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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