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살며 생각하며] 우리는 아무도 제대하지 않았다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원본보기 아이콘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세계평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으로 향한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기에 세계 여러 곳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던 분들이 모여 들고 있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내 뒤에는 일본에서 막 도착한 사토 유시유키 선생이 타고 있다. 이번 평화대회에서 발제 한 꼭지를 맡았다. 그가 발표하는 세션의 제목은 세계평화와 스포츠. 사토 상과 함께 영국 에딘버러대 이정우 교수, 서울대 김유겸 교수가 발제할 예정이다.

사토 상은 서툰 한국어로 자신을 평화에 대한 마음이 큰 러너(runner)라고 소개한다. 2년 전 여름에도 한국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퇴촌 ‘나눔의 집’에서 종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까지 ‘No War’라는 메시지를 들고 달렸다. 전쟁의 고통을 기억하고 연대를 통해 평화를 상상하는 마라톤이다. 매 년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500㎞가 넘는 거리를 3일에 걸쳐 릴레이로 달린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죽기 살기로 달리는 반전, 반핵, 평화의 마라톤이다.
기습폭설로 서울에는 난리가 났다는데 이곳 철원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춘천에서 온 체육교사 김재룡 선생이 우리를 반긴다. 정년퇴임을 세 학기 남긴 그는 고등학생 제자들과 친구처럼 엉기는 스포츠인류학자이자 시인이다. 납작한 모자에 콧수염을 길러 스스로가 붙인 별명이 밀정. 딱 어울리는 별명이라 속으로 웃었다. 구술채록으로 스포츠와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염탐하려고 왔단다.

김 선생의 안내로 꽁꽁 얼어붙은 한탄강 얼음 트레킹 코스를 걸었다. 한국전쟁 막바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곳에 이름만 들어도 슬픔이 느껴지는 한탄이라니(실제 뜻은 큰 여울이라는 뜻이라고 나중에 알았다). 불쑥 솟아 얼어붙은 바위이름조차 외로운 돌, 고석이다. 동행한 고광헌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몇 해 전 이곳에 와서 써 놓았다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시 한 자락을 꺼내 읊는다. ‘물속에 잠긴 절’이라는 시다.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이 시리다고 중간까지 읽다가 말았는데 하필 그가 멈춘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아무도 제대하지 않았다.’ 군대 다녀온 남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구절이라고 야유하면서도 서늘한 그 의미를 문득 새긴다. 그래 우리는 아무도 제대하지 않았던 거지. 시린 땅 철원, 슬픈 강 한탄을 곁에 두고 찬바람을 맞으니 처량한 생각이 복받친다. 한반도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전쟁의 기운은 언제 걷힐 것인가? 따뜻한 평화의 봄은 언제 올 것인가?

세계평화대회가 끝나는 2월 2일은 지난해 IOC에서 만장일치로 결의한 올림픽 휴전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 날 오전 국회정론관에서 평창 평화올림픽 성공개최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기원하는 세계평화대회 참가자 기자회견이 열린다. 철원에 모여 나눈 평화의 이야기들을 모아 결의문의 형태로 세상에 지르는 둥근 함성이다. 올림픽 휴전은 올림픽이 시작하기 일주일 전부터 시작해 패럴림픽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올림픽이 단순한 스포츠대회가 아니라 인류가 추구하는 매우 고귀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특히 이 한반도에는 1953년 이후 단 한 순간도 진짜 평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 한 자락에 잊으려 아무리 발버둥 친들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그림자가 마음 속 가장 밑바닥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평창올림픽은 우리에게 전쟁의 위협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진정한 평화를 맛보여 줄 절호의 기회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