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물빛으로 가라앉은
죽산 앞바다
등대보다 집들이 먼저 불을 켠다
몇 백 광년쯤 떨어진 눈이 반짝인다
지구 반대쪽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만
당신은 없고 나만 있다
기억의 안쪽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길을 묻기 위해 등대슈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빛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와서 저마다 몸 안에 감겨 있는 항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굽은 등에 남은 잔광이 희미하다 테이블 구석 엎드려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고 푸르딩딩한 눈두덩이에 아이섀도 짙게 그린 여자가 아이 오줌을 누이러 밖으로 나간다
■짐작하건대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해외 입양아인 듯하다. 그런데 "지구 반대쪽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만" 안타까워라 "당신은 없고 나만 있다". 얼마나 고되고 추웠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낙담하고 상심했을까.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파도를 넘어야" "기억의 안쪽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참 묘하지 않은가, 이 시의 마지막 행 말이다. "길을 묻기 위해" 들어선 "등대슈퍼" 안엔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와서 저마다 몸 안에 감겨 있는 항로"들로 "굽은 등"들이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리고 그 한구석엔 "엎드려 있"다가 요의 때문에 "칭얼거리"는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인 듯한 "푸르딩딩한 눈두덩이에 아이섀도 짙게 그린 여자"도 있다. "기억의 안쪽"이다. "당신"은 그곳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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