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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1] 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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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단추가 모여 있습니다. 수천 벌의 옷이 모인 것과 다름없지요. 저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단추의 만물상(萬物相)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근ㆍ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 제목 그대로 '단추'가 주인공인 전시회입니다. 관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제목이 너무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언뜻 일어났다가 스러집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느낌일 테지요. 이 작고 예쁘고 귀여운 사물에, 너무 무거운 의미를 실었다는 생각. 전시장 안은 진지하고 근엄합니다. 격조와 품격이 가득합니다. '단추의 인문학'이라 해도 좋고, '단추의 박물지(博物誌)'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파리의 어느 갤러리를 옮겨다놓은 것처럼, 이국적 분위기까지 느껴집니다. 생활 속 '오브제(object)'의 힘입니다. 익숙한 사물이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그것도 떼 지어 나타난 것에 대한 놀라움! 관념의 유희나 추상적 개념의 타이틀이 붙은 전시에선 경험하기 어렵지요.

이것은 '단추의 재발견'입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청바지 차림이던 동료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의 충격 같은 것 말입니다. 단추를 그저, 옷이나 여미고 주머니나 지키는 '문지기' 정도로만 알던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기능공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아티스트였던 격입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물에 오해를 갖고 사는지요. 단추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캔버스입니다. 손톱만한 공간에 온 세상이 들어앉습니다. 초상과 풍경, 구호와 문장, 시와 수수께끼… 그것들이 형태와 소재, 기법에 따라 천의 얼굴과 표정을 보입니다.
과학기술의 역사와 미래를 여는 상상력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으로 시작되듯이, 버튼 하나 들여다볼 때마다 세기(世紀)의 단면이 보입니다. 18세기 혁명과 19세기 산업, 20세기 상업이 보입니다. 단추가 타임머신의 버튼(button)입니다. 그것이 동화 속 사물들처럼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고, 기억의 스위치를 올립니다.

단추 하나하나가 이야기 캡슐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증명사진입니다. 현미경을 동원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코스모스(cosmos)'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보았던 혁명의 시간이 만화경처럼 들여다보입니다. 우디 앨런의 '미드나이트 인 파리'의 예술과 낭만의 거리가 요지경(瑤池鏡)처럼 펼쳐집니다.

전시장 입구 한쪽에 좋은 안내문이 붙어 있더군요. "옷을 입는다는 것은 개인의 행위지만, 넓게는 사회의 제도, 규범, 가치를 반영한 복합적 행위입니다. 복식문화를 살피는 것은 과거 사람들의 내밀한 마음을 살펴보는 일이자, 한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되짚어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추들이 살롱과 무도회장의 초인종처럼 보입니다. 상류사회가 보입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보석공예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알폰스 무하'가 도달한 '아르누보'의 정점(頂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슬며시, 심사가 비틀어집니다. 의복에 붙은 단추들이, 신분증 노릇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이 공연히 뾰족하게 떠오른 까닭입니다.

문학청년 시절에 어떤 화가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내가 미술대학 다니면서 제일 많이 한 아르바이트가 뭔지 알아? 단추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어. 주로, 유명 디자이너나 고급 의상실에서 나오는 일감이었지.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이 어떤 귀부인의 옷에 가 달렸을까, 지금도 궁금해."

단추가 계급장이나 배지(badge)로 보입니다. 마침, 벽에 적힌 역사적 에피소드 하나가 제 생각과 겹쳐집니다. "1894년, 체포된 '드레퓌스(Dreyfus)' 대위에게 가장 먼저 내려진 선고는 이것이었다. 단추와 계급장을 떼어라." 어떤 자리에서 물러남을 가리켜 흔히, '옷을 벗는'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의미겠지요.

아무려나, 훌륭한 전시회입니다. 이렇게 귀한 물건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해준 컬렉터에게 공경의 인사를 건넵니다. "고맙습니다. '알리오(L. Allio)씨. 당신 덕분에 '단추의 제국'을 보았습니다. 지구촌 동서남북과, 수백 년 시간의 창고를 뒤져서 세운 나라. 상징과 이미지의 궁전을 보았습니다."

뒷걸음으로 돌아 나오는데, 프랑스 문화재 대접을 받는 단추들이 제 티셔츠 단추를 쳐다봅니다. 제 단추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입니다. 그저 세상에 나온 뜻대로 사는 물건을, 기죽게 한 것 같아 미안해집니다. 가운데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여줍니다. "어느 단추가 지금 내 가슴을 지키는 너보다 귀하겠느냐."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셔츠 앞단추가 없다/가슴 옷자락 사이 벌어진 틈이 휑하다 동굴처럼 검다/이 어두운 속/낯익은 상여 한 채 지나간다, 까닭도 없이/드리워진 죽음의 행렬// (하략)
 - 박소란, '단추를 잃어버리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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