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물건이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곧잘 쓰던 표현 그대로, '옛날 고려(高麗)적'부터 그곳에 서 있었다지요.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자세 한번 고치지 않고 말입니다. 호시탐탐 더 나은 위치나 포즈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종종거리는 저 같은 소인배들은 당신 앞에서 마냥 왜소해질 뿐입니다. 무딘 붓으로 당신이 살아온 '정물(靜物) 870'여년의 사연을 짚어보려 하지만,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이 고개가 '마뉘꼴'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범도 나타나고 산적이 출몰할 만큼 으슥한 골짜기였다지요. 아직도 당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길손은 누가 있나요? 혹시, 저 한명회 대감을 가차 없이 꾸짖고 부여 무량사로 향하던 매월당 김시습 같은 사나이나 붓이나 먹을 사러 한양성 들어가던 과천 농부(果農) 김정희 선생 같은 분들은 못 보셨는지요?
생각해보면, 당신은 '천년 사극(史劇)'의 관객입니다. 아니, 어쩌면 조선왕조쯤은 한 화면에 담고 있을 무비카메라입니다. 당신의 장기(長技)는 엄청난 '롱테이크(long take)'지요. 필름을 되돌려보면 별의별 것이 다 보일 것입니다. 여우, 승냥이, 호랑이, 멧돼지… 야반도주하는 사내와 계집, 과거에 떨어지고 돌아가는 서생, 가렴주구로 한 밑천 잡아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탐관오리, 보부상… 임진년의 왜군, 청나라 장수, 행진하는 일본군대, 피난민 행렬, 미군 지프… 냄새 나는 고급세단, 고단한 오토바이….
당신의 기억창고 안에는 알려지기만 하면 국사편찬위원들이 한걸음에 달려올 만큼 놀라운 사료(史料)들도 많을 것입니다. 당신의 양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찰과 법원이 두려워할 만한 세월의 알리바이도 하나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당신의 '보호수(保護樹)'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보호감찰이나 사찰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이 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나 세금을 내기도 하는 예천 석송령(石松靈)처럼 팔자가 늘어진 나무인데 무엇이 걱정이냐고 묻습니다. 서울의 최고령 상록수로 갖은 호강을 누리지 않느냐며 눈을 흘깁니다. 틀린 말들은 아닙니다. 당신의 원기를 돋우기 위해 서울시는 수시로 당신 몸에 영양제 링거를 매달고, 커다란 물차와 높다란 사다리를 동원하여 때맞춰 목욕도 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에서 늙어가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할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보고 홀로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 묻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을 모두 알면서도 법원과 검찰청 앞을 그저 묵묵히 지나고 있는 목격자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테지요.
당신에게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봅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