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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세상의 배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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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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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Delphoe)는 그리스 중부의 포키스 지방, 코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동쪽과 서쪽에 풀어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날게 하니 델포이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곳에 돌멩이로 표시를 하고 신전을 지었다. 돌멩이를 가로되 '옴팔로스(Omphalos)'라고 했다. 그리스어로 '배꼽'이다.

옴팔로스에는 전설이 따로 있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아들이 권좌를 빼앗으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는 운명을 피하고자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는 족족 삼켜버린다. 레아는 여섯 번째 아이 곧 제우스를 낳자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 돌덩이의 이름이 옴팔로스다. 돌을 삼키고 속이 거북해진 크로노스는 이미 삼킨 제우스의 형과 누이들을 토해냈다. 모두 갓난아이 꼴로 세상 빛을 다시 봤다. 그래서 가장 늦게 태어난 제우스가 맏이가 된다.
세상과 탯줄로 이어진 곳이어서 일까.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영험하기로 소문났다. 카이레폰은 이곳에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하고 물어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코린토스 왕의 양자로 자란 오이디푸스가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들은 곳도 델포이의 신전이다.

소크라테스나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기구했다. 제명에 못 죽거나 사람다운 삶을 버렸다. 무릇 세상의 중심이란 곳은 모진 소용돌이가 쳐서 무엇이든 남아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제가 중심이고자 하며 제 사는 곳을 세상의 중심이라 우기니 이 또한 운명이라. 세상의 중심에 풍파와 죽음뿐이라면 아무도 그곳에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비바람을 몰고 다니는 영웅은 그 뜻이 아무리 웅혼해도 주군으로 모시기에 적당하지 않다. 함께 목이 떨어지면서 후회해도 소용없고, 때로는 그 주군이 죽음의 사신일 수도 있다.

'꿈 많은 열일곱 소녀 아키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그는 첫사랑 사쿠에게 부탁한다. 호주 원주민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는 울룰루에서 죽고 싶으니 데려가 달라고. 두 사람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병원에서 빠져나와 공항에 간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키는 죽었고, 17년이 지났다. 첫사랑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쿠는 아키의 유골을 지니고 있다…’
가타야마 교이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만들어 2004년에 개봉한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줄거리다. 울룰루는 원주민 말로 '그늘이 지나간 자리'다. 일본의 젊은 연인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물으면 이곳이 앞자리를 다툰다고 한다. 영화는 사쿠가 약혼녀와 함께 울룰루로 가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쿠의 여행은 아키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영결의 의식이자 새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구투(舊套)로 범벅이 된 영화지만 혼란과 죽음에 뒤덮인 세상의 중심을 사랑으로 정화하기에, 그래서 그곳에 사랑이 깃들었기에 참을 수 있다. 장맛비 추적거리는 여름밤에 식구들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리메이크한 우리 영화는 권하지 않는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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