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 시내를 벗어나 광활한 밀밭을 가로질러 산언덕을 오르면 위풍당당한 풍력발전기들이 보입니다. 바람의 길목인 모양이네요. 높이 40m, 날개 길이 20m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물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산언덕 한쪽엔 순례자 철제 조형물도 있지요. 1996년, 발전기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요 기념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4개의 조형물들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남녀 순례자는 물론 개와 당나귀도 있지요. 생활 자체가 이동하는 겁니다.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된 9세기 이래 1200년간 그랬습니다. 순례가 생활의 일부가 된 거죠. 그 친근한 생활 조형물 어느 자리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네요.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LAS ESTRELLAS’. ‘별들이 바람에 따라 흐르는 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적인 분위기네요. 산티아고 길에서 문학적 영감이 가장 충만한 장소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별, 지상의 먼 끝에는 길. 별은 인간의 힘으론 도달하기 어려운 신의 눈빛, 길은 인간이 감내하며 걸어가야 할 자기 수행의 느낌을 가지죠. 신과 인간,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네요. 십자가 도형이 자연스레 만들어집니다. 스페인어 크루자(CRUZA)는 십자가 또는 교차의 뜻이죠. ‘별들이 바람에 따라 흐르는 길’도 직역하면 ‘바람의 길과 별들의 길이 교차하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십자가엔 가슴 뜨끈한 대속(代贖)의 윤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천상의 원리와 지상의 원리가 교차하죠. 세로축은 별을 향해 솟아오르고 가로축은 길을 향해 뻗어갑니다. 바람은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두 공간을, 신과 인간을 매개합니다. 바람은 천사. 신의 사랑과 인간의 길을 이어주는 길고 강인한 공기의 힘줄입니다. 그래서 별과 길과 바람은 이 짧은 문구 속에 한데 어우러져 존재의 밤하늘을 밝히는 빛나는 경전이 되는 겁니다. 천사의 손길을 따라 별빛이 비추는 들판으로 가는 길. 다음에 다시 오면 여기, 별이 빛나는 밤의 들판을 걷고 싶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걸까요? 일상에서 실천하는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 아니듯이,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진정한 용서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는 내가 먼저 베푸는 겁니다. 내가 먼저 사랑 주어야 하고 내가 먼저 미움 놓아야 합니다. 사랑은 생명이고 미움은 죽음이죠. 미워하면 상대방만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도 죽입니다. 죽어가는 제 마음 살리는 일. 그게 용서입니다.
바람 세차게 부는 이 언덕에 서서 먼산바라기 해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가슴에 함께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19세기 중엽까지 ‘용서의 성모’를 모시던 작은 성당이 있던 곳이자 순례자 병원을 운영하던 곳이라 전합니다. 성모는 무엇을 용서하고자 하셨을까요. 죄 지은 자. 영적 건강을 원하는 자. 이 언덕에 모두 올라와 용서를 구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해서, 성당은 비록 사라졌으나 그 이름은 지명에 남았습니다.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
하지만 저는 용서의 언덕이 이곳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별들의 길과 사람의 길과 바람의 길이 만나는 곳. 당신이 마음만 내면 이를 수 있는 곳. 당신에게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보다 내가 먼저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는 곳. 그 모든 곳에 용서의 언덕은 있습니다. 마음. 오직 마음뿐. 유심(唯心)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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