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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의 중국여지승람]소흥, 와신상담과 토사구팽의 현장

최종수정 2017.05.11 17:57 기사입력 2017.04.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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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의 옛 골목 풍경

소흥의 옛 골목 풍경

소흥은 절강성에 있는 도시로 항주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의 가까운 곳이다. 소흥은 고대의 우왕(禹王)으로부터 현대의 노신(魯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이 활동한 곳이고 역사적 문물도 풍부하여 '담장 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문학적 유적이 산재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토사구팽(兎死狗烹)에 관련된 유적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두 사자성어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 고대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에 장강 이남에 두 개의 부족이 웅거하고 있었으니 지금의 강소성 소주를 중심으로 한 오(吳)나라와 절강성 소흥을 중심으로 한 월(越)나라가 그것이다. 이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도 생겼다. 양국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한 번은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는 병사 5000명을 이끌고 근처의 회계산(會稽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은 치욕적인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조건으로 구천 부부와 신하인 범려는 오나라에 인질로 잡혀 2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는 오나라의 석실(石室)에서 생활하며 풀을 베어 말을 사육하는 일을 맡았고 부인은 물을 길어 말똥을 청소하는 등의 궂은 일을 했다. 또한 부차가 행차할 때면 말고삐를 잡고 마부 노릇을 해야만 했다. 일국의 제왕이었던 그가 이렇게 천한 일을 감수한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때는 부차가 심한 설사병을 앓아 고생을 하자 그의 변을 입으로 맛보고 병을 진단해주기도 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부차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고 2년 후에는 귀국을 허락 받았다. 부차는 구천이 재기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가까스로 귀국한 구천은 비상한 각오로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장작더미 위에 누워 자기도 하고[臥薪], 거처하는 방에 짐승의 쓸개를 매달아 놓고 누워서 쓸개를 올려다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라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쓸개를 핥았다고 한다[嘗膽]. 이것이 이른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인데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렇게 구천은 절치부심하며 복수를 다짐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신하인 범려와 문종(文種)의 건의를 받아들여 2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를 세웠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부인은 몸소 길쌈을 했다. 그는 육식을 하지 않고 겹옷을 입지 않았다. 또한 사방의 어진 인재들을 초빙하여 후하게 대접했으며 가난한 자를 돕고 죽은 자를 위문하는 등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고 한다.

드디어 BC 473년에 오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구천은 북으로 진격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초장왕(楚莊王), 진목공(秦穆公)과 함께 '춘추오패(春秋五覇)'의 반열에 올랐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구천이지만 주인공 못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 조연이 범려와 문종이라는 두 신하였다. 범려는 2년간의 인질 생활을 함께 하며 구천으로 하여금 복수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보살폈으며 이 기간에 문종은 월나라의 국정을 맡아 원대한 계획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범려는 상장군이 되었지만 구천에게 물러날 뜻을 전했다. 이른바 '공성신퇴(功成身退-공을 이루고 나서 자리에서 물러난다)'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겠다고 결심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보기에 구천의 사람됨이 '어려움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같이 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범려의 의사를 전달 받은 구천은 범려를 만류하면서 "나는 나라의 절반을 그대에게 주려고 한다. 나의 청을 거절한다면 나는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죽일 것이다"라 하여 반 협박조로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범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범려는 간단한 보물을 챙겨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멀리 떠나버렸다. 범려가 떠난 후 구천은 회계산을 범려의 영지로 하사하고 궁전에 범려의 동상을 만들어 신하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그 앞에서 절을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범려는 제(齊)나라에 도착하여 성과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큰 재산을 모았고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이 나서 제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와 명예를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멀리 도(陶) 땅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장사를 하여 또다시 큰 재산을 모았다. 이후 '도주공'은 중국 부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급기야 범려는 중국의 '4대 재신(四大財神)'의 반열에 올라 추앙을 받았다.

한편 문종은 범려와 달리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역시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범려가 제나라에 도착하여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새가 다 잡히면 활 잘 쏘는 자는 숨어버리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狡兎死]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走狗烹].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새처럼 뾰족하니 어려움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같이 할 수는 없소. 그대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성어가 만들어진 유래이다. 문종은 이 편지를 읽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하자 구천은 그에게 칼을 내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다. 월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큰 공을 세운 자신을 설마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으나 일이 이렇게 되자 문종은 범려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비정한 것이어서 권력을 탐하는 정치판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토사구팽'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니 범려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소흥 서북쪽에 있는 부산(府山) 기슭에 월왕대(越王臺)와 월왕전(越王殿)이 있다. 월왕대는 구천이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여 묶게 하면서 자문을 구한 곳이다. 조상이 소흥에 살았던 주은래 총리가 1939년 성묘 차 왔을 때 월왕대에 올라 소흥 시민들에게 '구천의 불굴의 정신을 본받아 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와신상담하면서 국력을 키운 구천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월왕대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월왕전이 나타나는데 3개의 대형 오석(烏石)에 구천, 범려, 문종의 상반신이 선각(線刻) 되어 있고 양쪽 벽에는 '와신상담도'와 '복국설치도(復國雪恥圖-나라를 회복하여 치욕을 씻다)'란 제목의 대형 벽화가 걸려 있다.

산 위로 올라가면 문종의 묘가 나온다. 생전의 그의 업적에 비하면 무덤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든다. 산 정상에는 비익루(飛翼樓)가 웅장하게 서있다. 이 누각은 구천이 오나라에서 돌아온 후 범려를 시켜 세운 4층 건물인데 오나라의 동정을 관찰하려는 군사적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누각 전면에 '고월제일루(古越第一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소흥이 월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곳곳에 구천과 관련된 유적과 조형물이 있는데 그중에서 볼 만한 것이 감호(鑑湖)안의 작은 섬 호로취도(葫蘆醉島)에 설치된 거대한 조각군이다. 이 조각의 모티프는 이렇다. 20년의 준비 끝에 구천이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는 날 어떤 노인이 술 한 동이를 구천에게 바쳤다고 한다. 구천은 이 술을 혼자 마실 수 없어서 궁리 끝에 술을 강물에 흘러 보내어 주위에 있는 군사들이 한 모금씩이나마 함께 마시게 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오나라를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 이야기를 조각화한 것이다. 장군복을 입은 구천이 술동이를 거꾸로 쏟아 붓고 하천 가에는 병사들이 엎드려 강물을 떠 마시는 모습을 매우 잘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물이 고이는 연못 벽에는 '호주흥방(壺酒興邦)'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한 동이의 술이 나라를 흥하게 했다'는 뜻이다. 또 소흥 시내에는 실제로 구천이 술을 쏟았다는 하천이 있다. 그 이름이 '투료하'로 '술을 던져 쏟은 하천'이라는 뜻이다.

송재소

송재소

송재소는 ...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다산문학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한문학회 회장을 지냈고,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퇴계학연구원 원장이자 다산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다산시 연구』 『한시 미학과 역사적 진실』 『주먹바람 돈바람』 『한국 한문학의 사상적 지평』『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한국한시작가열전』, 역서로 『다산시선』 『다산의 한평생: 사암선생연보』 『역주 목민심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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