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방향으로만 지나치게 길게 이어진 돌 건축이어서 안정감이 걱정되는데 지난 2000년 간 저토록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로마 건축술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하중을 분산시키는 아치형 구조가 안정감의 비밀이 아닐까 싶네요. 무지개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반원형 공간을 만들면 위에서 누르는 하중이 분산되는 원리를 활용하는 거죠. 아치는 로마의 독특한 건축기술이었습니다. 아치를 길게 늘여 대나무 갈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을 만들면 볼트가 되고, 아치를 회전시켜 반구형 천정을 만들면 돔이 됩니다. 아치와 볼트와 돔은 로마에서 꽃피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진 ‘건축의 지혜’입니다.
재미있는 건 또 있습니다. 낱낱의 돌들이 쌓이면 미세한 흔들림도 있을 테지요. 통짜배기 돌이나 시멘트 콘크리트보다 탄력이 더 생기지 않을까요? 접착제를 쓰지 않고 2만 개 돌들끼리 서로 긴장하면서 균형을 잡는 공법. 1번 돌이 2만 번 돌까지 영향을 미치는 관계. 완벽한 공동체의 개념이 돌과 물을 만나 지상에 실현되는 경우죠.
저 혼자 이런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 겉모습과 뛰어난 축조술에 감탄할 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공동체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람 2만 명,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요? 저마다의 자유와 권리와 제 위치를 존중해 주면서 전체를 아름답고 안정되게 만드는 관계 말입니다. 전체주의는 통짜배기여서 지진이나 충격에 위험하고, 민주주의는 자유롭기는 하나 어지럽고 시끄럽기 마련이죠. 여기 ‘오래 새로’ 된 그 정치철학의 대안이 있습니다. 사람 관계의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배우려면 한 번쯤 세고비아 돌다리 물길 앞에 서 보기를 바랍니다.
돌 위를 흐르는 물은 아마도 돌을 많이 울렸을 겁니다. 정복자의 창검 아래 무수히 쓰러진 사람들. 그 피와 고름과 상처가 증발하여 구름 같은 데 모여 있다가 비가 되어 내려와선 강물로 갔을 텐데요. 그 강물 끌어와 돌길에 흐르게 하니 돌인들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목숨은 생마다 다른 모습으로 돌고 돌아 가없이 떠다니는 나그네일진대, 이토록 반복 지속되는 생로병사를 물인들 돌인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만해 한용운의 명시 〈알 수 없어요〉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부드러운 물의 손길이 무심한 돌을 어루만지고 가면 무뚝뚝한 돌도 운다는 상상력입니다. 헌데 그 물은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난다고 합니다. 오늘 내가 마시는 이 물 속엔 2000년 전 조상의 피도 조금, 땀도 조금 들어 있다는 뜻 아니겠는지요. 순환하는 에너지는 돌고 돌기에 근원이 없다고 한 듯합니다.
지금은 돌다리 물길에 물 흐르지 않습니다. 1884년까지만 흘렀다는군요. 2000년 간 세고비아의 식수원이자 생명수였던 저 물. 오늘은 물 흐르지 않아 돌들도 울음을 멈추었을까요? 2만 개의 돌들은 무어라 속삭일까요? 돌기둥에 붙어 서서 가만히 귀를 대어봅니다. 아듀~ 2018.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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