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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1]몬세라트 산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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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톱니 모양의 장대한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습니다. 신성한 산 몬세라트입니다. 설악산 울산바위와는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죠. 울산바위가 시원 깨끗한 화강암질의 백색 미녀라면, 몬세라트는 사암과 역암의 장엄 숭고한 붉은 장군입니다. 천하절경 기암괴석. 대평원 위에 불쑥 솟은 1236m. 성스러운 바위 가족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습니다. 울퉁불퉁 비정형의 거친 외형은 자연의 손길이 만든 침식작용 때문일 테죠. 파이프 오르간처럼 죽죽 뻗은 바위산의 세로줄은 수도원의 기도와 합창 소리를 하늘에 전달하는 듯합니다.

산 중턱 수도원에 검은 성모상이 있습니다. 유럽 여러 성당에 있는 검은 성모상 중 가장 대표적인 성모상이죠. 아기 예수를 안고 있어서 정확하게는 ‘성모자상’입니다. 콤포스텔라의 야곱 묘 발견과 비슷한 설화가 전해옵니다. 무어인의 지배를 받던 880년, 한 양치기 소년이 밝은 빛과 천상의 음악이 나오는 성스러운 동굴 ‘산타 코바(Sante Cova)’에서 나무로 된 성모 조각상을 발견한 이후 그 자리에 건립된 성당. 성모상 친견하러 오는 천년 전통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매일 오후 1시에 열리는 합창단 공연을 먼저 봅니다. 14세기에 창립된 소년 합창단입니다. 이곳 출신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회고에 따르면, 건립 당시부터 순례자들은 성당 앞 중정에 모여 노래하며 춤추었고 수도사들은 노래를 짓고 편곡을 했답니다. 수도사들은 14세기부터 순례자들의 노래를 여러 곡 받아 카탈루냐어로 쓰인 『붉은 책』에 적어두었는데 그 책은 유럽의 다성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하네요. 700년 동안 이어온 소년 합창단. 옛 순례자들의 노래를 다시 부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광객들은 넘쳐나고 30분 이상 꼬박 서서 기다렸지만 노래는 두 곡 부르고 끝납니다. 성스러운 체험 대신 마케팅을 위한 관광코스 느낌이 더 듭니다.

성모자상 참례 때도 비슷한 기분이죠. 세계 전역에서 온 이들은 성모의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소원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죠. 기도의 순수함보다 내 몫의 시간이 더 신경 쓰입니다. 소원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없으면 이토록 많이 올까 싶기도 합니다. 복 바라는 사람 마음, 참 약합니다. 이야기는 믿음의 약. 그렇게 믿으면 약이 되는 법입니다. 게다가 성모는 영원한 어머니 아닙니까. 나무로 만들어 옻칠 여러 번 입히니 점점 심연의 밤하늘 색입니다. 우주의 깊은 색이 되어버린 성모. 근원의 어머니는 유럽에서도 ‘가믈 현(玄)’의 색조로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노자가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이라 했는데, 영원히 죽지 않는 여성 어머니를 검은 색으로 표현한 이유도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컴컴한 동굴 속에 숨어 있어야 했던 성모. 기나긴 어둠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성모. 검은 색은 그래서 더 사무칩니다.

사람을 벗어나 정상으로 오릅니다. 전망이 트여 사방 모조리 시원합니다. 서양문학에선 정상의 기쁨을 올림포스 산상의 향연에 비유해 ‘상환(上歡)’이라고 합니다. 여러 신들과의 만남을 의미하지만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보는 ‘꼭대기의 기쁨’ 또한 빠질 수 없죠. ‘회당능절정 일람중산소(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뭇 산의 작음을 굽어보리라’. 스물네 살 두보가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망악(望岳)」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중국 당나라 청년의 웅혼한 기백이 수려한데요, 마침 한국 청년 두 사람을 만납니다. 들판 향해 낭떠러지 끝에 서며 사진을 부탁하네요. 그들의 잘생긴 얼굴보다 듬직한 등판이 더 멋진 순간.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밝은 우리 청년의 미래. 젊은 그들에게 일람하는 뒷모습의 묘(妙)를 새로 배웁니다.
그들이 지난 자리. 천지사방 일람하니 상상이 무럭무럭 피어납니다. 들판은 찬란하고 하늘은 많습니다. ‘찬란함’과 ‘많음’ 사이에 서 있는 인연. 사람이 하늘의 시작이며 땅의 끝이기도 한 상환(上歡)의 찰나. 저는 무한정 많습니다! 찬란합니다! 이건 제 의식이 아니라 몸 세포 속 무한량의 생명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의 자기선언입니다. 그녀는 20억 년을 살아 온 생명의 어머니. 몸 안의 진정한 역사적 주인. ‘가장 좋은 기쁨’은 호연지기도 산상의 향연도 아닌 그녀와 만나는 순간이란 걸 생각해 봅니다. 얼마나 오랜만인가요. 정신의 산상에서 마음 바다 가득한 생명의 어머니를 만나는 일. 세상의 모든 시가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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