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은 선대에 비하면 검소했다. 왕과 왕비는 왕실 예산의 10% 정도만 소비했다. 왕비는 남편이 지어준 궁전을 소박하게 장식했다. 빈민구제에 관심이 컸다. 1784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돈을 다 써서 딸에게 새해 선물을 주지 못했다. 빈민들을 돕기 위해 드레스를 팔고 국민들이 '악마의 음식'이라며 꺼리는 감자에 대한 혐오감을 없애려 감자 꽃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왕비는 1793년 10월16일 거름통을 싣는 수레에 실려 콩코드 광장에 있는 사형대로 끌려갔다. 남편이 죽은 이튿날이었다. 그녀는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자 사과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죽기 전에 시누이에게 편지를 남겼다. "우리를 대신해 복수하려 하지 말기를. 나는 적들이 나에게 한 행동을 모두 용서합니다."
왕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남편은 루이 16세다. 그녀에 대한 비난에는 '가짜뉴스'가 많았다. 가짜뉴스는 피에 굶주린 자들의 주술이다. 그 목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살인이다. 왕비의 악마성을 표현하는 대표적 예는 그녀가 했다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말종이 아니었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공주가 난처한 경우를 모면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백성들에게는 먹을 빵이 없다는 말을 듣자 '그러면 브리오슈를 먹는 게 좋겠다'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도 브리오슈를 샀다."(홍승오 번역ㆍ294쪽)
마리 테레즈는 혁명의 불길 속에 살아남아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파리로 돌아가 왕태자비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탈출해 파리로 진군한다. 모두 두려워 탈출하기 바빴다. 마리 테레즈만 군대를 소집해 맞서려 했다. 나폴레옹은 "그 가문의 유일한 남자"라며 감탄했고 그녀의 탈출을 막지 않았다.
마담 루아얄은 1851년 오늘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도르프에서 죽었다. 일흔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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