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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팔순 老선배의 은퇴생활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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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전 직장을 찾았다. 사우회가 은퇴한 고참 선배의 특강을 마련해서다.

팔순을 넘긴 노 선배가 한사코 고집했다는 특강의 제목은 '나의 은퇴생활 20년의 참회'. 주최 측은 팔순 기념으로 자서전 '노을 지는 언덕 위에서'를 출간한 선배가 새로운 출판양식(글보다 사진을 위주로 한 파격적 편집에 카드형 USB까지 담겨 있었다)을 선보인 것을 높이 사 제작 노하우에 초점을 두자고 했건만 노 선배는 '참회'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은퇴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원에서 출발해 회사의 사장을 거쳐 오너 다음 자리인 부회장까지 지낸, 성공가도를 달려온 선배를 그토록 '참회'하게 만들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자연스레 나를 특강장으로 이끌었다.
노 선배의 일갈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은퇴. 그리고 이어지는 고향, 동창, 사교모임들. 늘어나는 것은 체면유지비요, 피곤해지는 것은 몸이었다.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에 비쳐본다면 20년이란 무엇을 이루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이 없으니 참회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아코디언의 세계에 발을 디민 선배는 더더욱 허송세월한 은퇴 이후의 시간들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내 기억 속의 선배는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꺾어버리는 '무섭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 '군기반장' 같던 선배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꿈에 본 내 고향'을 연주하고, '그 겨울의 찻집'으로 우리를 인도하다니…. 참으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고 말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선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준비 없이 흘려 보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회한만 가득했다.

노 선배는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감기 걸려서 병원에 간다'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거나, 목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져 유명을 달리하는 이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인생의 궤도를 수정했다"고 털어놓았다. '내 자신의 삶'으로 '남이 평가하는 삶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자' 등을 설정하고 '항상 새롭게 움직여 나가자'를 행동지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악기는커녕 오선지 위의 악보를 읽는 것도 서툴렀던 노 선배가 자서전이라는 활자매체에 자신의 연주를 동영상으로 찍어 USB에 담아낼 수 있었던 숨은 힘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 2018'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4세다. OECD 국가들의 평균보다 1.6년이나 길다. 한국 남자는 79.3세, 여자는 85.4세로 여자들은 남자보다 6년여를 더 산다. 과연 여성들은 더 오래 사는 만큼 은퇴 이후의 삶을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을까. 미안하게도 나의 답은 '아니다'다. 오히려 은퇴자의 삶이란 남성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마저 있다. 은퇴의 사전적 풀이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냄'이다. 그러나 은퇴가 반드시 직장 생활을 비롯한 사회생활에만 적용되는 단어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역으로 담당해온 크고 작은 일들로부터 손을 떼야 하는 시기, 그것이 바로 은퇴가 아니겠는가. 사회생활은 물론이요, 가정생활에서도 주역에서 조역으로 물러서야 할 때가 언젠가 찾아온다. 전업주부들도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에 빠져 자리를 보전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더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직의 생리다.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조역으로 물러선 이후의 삶에 대한 궁리가 필요하다. 은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예외 없이.

홍은희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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