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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대포를 녹여 만든 성모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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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65. 산티아고 가는 길 중 하나입니다. 보통은 프랑스 서남단 국경 마을 생장피에르포르에서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를 가로질러 산티아고까지 800㎞의 길을 많이 걷습니다. 35일 정도 걸리는 '카미노 프란세스'입니다. 프랑스 남부 산악 지대인 르퓌앙블레에서 출발하는 더 긴 길도 있습니다. 여기서 생장피에르포르까지 800㎞ 정도 됩니다. 이 길을 GR65 길, 또는 르퓌길이라고도 합니다.

르퓌길과 카미노 프란세스를 합하면 1600㎞인데 이를 두 번 왕복하는 사람을 길에서 만난 적 있습니다. 건장한 프랑스 중년 남자. 그가 내게 산티아고까지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형제 만난 듯 반가웠죠. 출발지가 같다는 걸 우리는 서로 압니다. 르퓌앙블레. 파리에서 레옹까지 테제베를 타고 거기서 기차를 두 번 더 바꿔 타야 합니다.
르퓌앙블레는 오베르뉴의 산들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도시입니다. 붉은 지붕들이 예쁜 마을. 화산 폭발로 생긴 높다란 바위산이 군데군데 솟아 있고 그 한 꼭대기에 독특한 조각상이 있지요. 1856년 크리미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대포 213문을 녹여 만든 성모상입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도시 전역을 굽어보고 있는데 전체 색조가 붉은 색이어서 붉은 성모상이라고도 불립니다. 표정이 슬퍼 보이는 게 좀 이상하죠. 높이는 12m. 내부의 나선형 철제 계단을 통해 성모상 얼굴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거기 가보았습니다. 성모의 머리 위는 유리 천장이어서 자연채광 효과가 있습니다. 유럽의 많은 건축물들은 자연채광을 택합니다. '하늘이 주는 빛'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골마을 자그마한 성당에 들어갔을 때, 어두컴컴한 공간에 홀로 앉아 한없이 깊이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해가 높이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바라본 성인 남자의 어깨. 그 묵직한 어깨를 어루만지는 빛의 손길. 실루엣으로만 각인되는 침묵의 공간을 잊지 못합니다.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운 체험'을 느낍니다. '거룩한 인간'은 예수나 성모만이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도 많다는 걸 말입니다. 식(識)이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거룩합니다. 일곱 살 베로니카, 야채장수 마르코, 거리의 꽃 파는 남자 호세 거룩합니다. 노량진 생선시장 좌판 주인 부돌이 엄마 거룩합니다. 행인 당신도 원래부터 거룩합니다!

거룩한 어머니, 성모의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조각상 내부가 은은히 밝습니다. 승리의 기념으로 가져온 전리품 대포. 그걸 녹여 왜 성모상을 만들었을까요. 조각상 아래쪽 노트르담 성당에는 야고보의 동상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 이후 처음 순교하는 제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야곱, 제이콥, 산티아고 등으로도 불리는데 그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까지 걸어가는 순례의 전통이 오늘날 산티아고 길이 된 겁니다. 저는 르퓌길에서 출발하기로 합니다. 여러 의문과 마주하고 스스로 답해야 할 시간도 많을 테지요. 그 처음이 바로 대포 성모상입니다.
크리미아 전쟁은 1853년부터 3년간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에서 일어난 국제전입니다. 러시아가 영토를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크리미아를 침략함으로써 시작된 이 전쟁은 결국 오스만 투르크,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부동항 확보를 통해 유럽의 강대국이 되고 싶었던 러시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야만 자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핵심이익이 충돌하면서 많은 사상자들이 생겼습니다. 이들 국가는 이 전쟁 전후로도 동맹과 파기, 협력과 침공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국제관계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것을 역사 연표에 남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 아닌가요.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핵심이익을 놓고 치열하게 겨루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다시 못 볼 사람들이 또 생겨날 테지요.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은 숭고한 박애정신을 발휘해 고결한 인간의 표본이 되었지만 이미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나이팅게일을 찬양하기 전에 나이팅게일이 필요 없는 평화세계를 만드는 게 더 지혜롭지 않을까요. 사실 평화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습니다. 힘의 우위가 답이 아닌 사회. 옆 자리의 남편이 보살이고 잠든 아내가 천사임을 깨닫는 사회. 우리가 '거룩한 인간'일 때를 생각해 가까운 누구에게라도 신경질 부리거나 화내지 않는 바로 그런 사회입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살상용 대포로 성모상을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평화의 사도 이미지 속에 승리의 자부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집결했던 이곳. 먼 길 떠나기 전에 잠시 묵상해 봅니다. 전쟁 무기로 나를 만들지 말라! 네 형제를 죽이고서 뉘우치지 말고 처음부터 싸우지 말라! 르퓌앙블레의 성모상이 슬퍼 보이는 이유를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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