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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낡은 신발과 책임의 무게

최종수정 2018.07.25 11:50 기사입력 2018.07.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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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한 정치인의 죽음을 아침 기차에서 들었다. '문학,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란 토론캠프에서 한 편의 시가 갖는 힘을 이야기하러 가던 길이었다. 너무 놀랍고 황망하여 내내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노동자와 약자를 위해 싸워온 투사, 젠더 감수성도 남달라 여성들의 아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던 분, 종교ㆍ인종ㆍ언어ㆍ연령ㆍ성별ㆍ지역에 따른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한 분, 낡은 셔츠에 낡은 신발을 신고 버스를 타고 다닌 국회의원,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 분,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 그 통찰력 깃든 유머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후원금에 대한 절차적 문제를 제대로 처리 못 한 책임을 통감하고 가장 귀한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돈 많은 사람에게나 유리한 정치자금법이 청렴한 정치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말과 책임의 무게, 그 경중을 생각한다. 쓰임새가 불분명한 국회의원 특수활동비를 없애자 했고, 평생 자기 안위와 거리가 먼 삶을 사셨다. 본인이 추구한 가치에 금이 가는 걸 견디지 못하셨겠지만 실은 진보와 정의의 앞날을 위한 희생일 것이다. 아깝고 아프다. 구정물이 차고 넘치는 대한민국 정치에서 옳은 길을 헤쳐나갈 큰 나무를 우리는 잃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부산역에 내려 이동하던 중 부산항의 컨테이너 크레인을 봤다.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학처럼 곧은 자세로 붉은 크레인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게 부산의 상징입니더." 기사님 말씀. 그 크레인의 곧고 붉은 힘을 마음에 새기고 큰 강당을 가득 메운 아이들 앞에 섰다.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집중하는 학생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의 시를 들려주며 경쟁이 아닌 공존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신분이나 계급 차이 없는 평등한 관계를 중시한다. 삶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므로 실수나 실패는 또 다른 배움의 기회로 인식된다. 선택이 틀렸더라도 그에 합당한 몫의 책임을 지고 다시 일어서도록 이끈다. 누구보다 청렴하고 결곡했던 정치인의 죽음은 책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쪽의 윤리적 염결성만 우리가 너무 강조하지 않았는지, 그가 감당한 책임의 무게가 너무 크고 그 순정한 고뇌가 아프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윤리적 염결성이 시의 뼈대를 이루는 시인 윤동주의 시 '소년'의 시작 부분이다. 뚝뚝 떨어지는 것은 슬픈 가을이 아니라 우리의 귀한 생목숨이다. 해고 노동자가, 굶주린 이가, 쫓겨난 이가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최저생계에 필요한 안전망이 부재한 나라. 권력자는 수억 원을 받고도 무죄로 풀려나고 평화로운 시위를 계엄령으로 막는 끔찍한 꿈을 꾼 자들이 여전히 당당하다. 말을 뒤집고 약자를 기만하는 자들이 큰소리친다.
그런 나라에서 평생 지녀온 정의라는 가치와 말의 책임을 목숨과 바꾼 정치인.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고 시인은 말했는데 그가 아프게 떨어진 자리에 어떤 봄을 마련할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모든 소년과 소녀들이, 청년들이, 정의와 진보, 평등과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붉은 크레인처럼 굳건하면 좋겠다. 떠나신 분의 낡은 신발과 책임의 무게를 마음에 새기며 그가 꿈꾼 사회가 올 때까지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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