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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네안데르탈인의 노래

최종수정 2018.05.18 08:34 기사입력 2018.05.1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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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한동안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겠다. 참으로 유감이다. 그래도 그의 시를 읽으며 자란 문단의 한 부스러기로서 아예 기억에서 지울 수야 있으랴. 그의 이름과 함께 나는 맨 먼저 '문의마을'을 떠올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다음은 '춤'이다. 나는 그를 춤으로 떠올린다.

그는 1998년 북한에 다녀온 뒤 '북한탐험'이라는 여행기를 쓴다. '온정리의 구름'편에 이 구절이 나온다. "시중호 휴게소 한 옆 잔디밭에서 흥겹게 춤판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원산 금강원동기합영회사의 노동자들로 금강산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얼결에 그들 속에 섞인 나는 아코디언이 연주하는 '휘파람'이란 북한 유행가 곡조에 맞춰 함께 춤을 추었다."

2013년 2월14일자 '뉴스앤조이'라는 매체에 실린 그의 기사에도 춤이 나온다. "문익환 목사와는 가장 밀착된 형제였다. 둘이 만나면 좋아서 껴안고, 춤추곤 했다"는. 거기 실린 사진 설명도 있다. '문 목사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감옥에서 잠깐 나와 장례를 치른 적이 있었다. 사진은 빈소를 찾아 온 고은 시인과 문 목사가 서로 반기며 춤을 췄던 모습.'

누가 추든 춤은 몸이 부르는 노래다. 노래는 거룩하여 신의 언어를 닮는다. 플라톤은 음악과 시를 이데아의 복제품으로 보았거니와, 노래는 시와 음악을 더해 인간을 연주함으로써 신의 언어를 재생하는 소프트웨어이다. 그래서 신의 모상(模像)인 인간의 성대는 노래하기에 알맞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아, 네 입을 크게 벌려 노래하여라.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보다 나은 종자였다면 노래도 더 잘 불렀으리라. 눈과 얼음에 덮인 유럽의 고대를 네안데르탈인이 누볐다면 그들도 목울대를 경련하듯 떨며 요들 비슷한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알프스에 올랐을 때, 나는 융프라우요흐에 때 맞춰 쏟아지는 폭설 아래서 원시 인류의 요들을 들었다. 그 끝없는 환청. 그날 밤 인터라켄에서 슈납스를 마실 때는 스스로 네안데르탈인이 되어 당장이라도 목청을 뽑고 싶어졌다.
해마다 5.18을 맞는다. 그때마다 기억은 1980년대를 소환한다. 그 청춘의 한 시절을 낭만으로 기억할 수만은 없다. 피의 시대, 죽음의 연대였으므로. 광주의 5월이 한 세대의 영혼을 온전히 지배했다. 그 자장(磁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청년들은 무엇을 무기로 싸웠던가. 화염병? 투석전? 그 모든 것을 노래에 실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한 시인의 이름이 '미투'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금기어가 되었다. 그의 이름과 더불어 뛰어난 문학평론가 김현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인가. 이 선험(先驗)의 출처를 기억하지 못한다. 김현은 우리 시를 읽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가 김수영에 대해 쓰기를 "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고 했다. 멋지고 비장한 언어.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다. 5월. 그리움과 존경을 담아 옮겨 적겠다.

"그의 시가 절규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끝내 노래한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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