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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공룡의 입술

최종수정 2018.05.11 09:36 기사입력 2018.05.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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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 …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중략)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고운 입술이다 … 스며라 ! 배암'

미당(未堂)의 시는 욕을 참으로 많이도 본다. 쓰윽 들여다보면 알 것도 같으니 묵객과 선비는 물론이요 잡놈도 입을 댄다. 세상은 바뀌어 시인입네 평론가입네 자칭하는 무리가 허다하다. '관능'이니 '신라정신'이니 몇 토막 주워 섬기면 도통한 흉내도 수월하니 어찌 큰 유혹이 아니겠는가. 시의 주인에게 허물이 작지 않으매 '민족혼'을 들먹이면 짐짓 결기를 시전하기에 족하다. 시선(詩仙)이요 시성(詩聖)이라는 찬사에 원한을 품었기에 시귀(詩鬼)를 입에 담아야 직성이 풀리는 독한 혀가 허다하다. 맑은 숲에 독향(毒香)이 없으니 극한 언어는 말하는 자의 내면에 자욱한 유황의 연기로다.

'쥐라기 공원'이라는 영화를 보고 경악한 나는 이내 미당의 시를 떠올렸으니, 곧 '화사(花蛇)'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오늘까지 파충류라는 놈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가 아는 파충류란 과묵하고도 수줍음을 타는 녀석들이다. 나일 강의 킬러 악어나 먹이를 둘둘 감아 으스러뜨린다는 보아 뱀, 공룡의 후손이라는 코모도 드래건 같은 거대 파충류도 목소리로써 어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는 티라노사우루스라는 놈이 길고도 웅장한 포효와 함께 등장하더니 끝날 무렵에는 스크린 안팎을 아예 난장판으로 만들고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웠다.

성대를 울려 소리를 만들고 의사를 주고받는 기능을 후손의 대에 이르러 내다버리지는 않았으리. 티라노사우루스도 결코 울부짖는 동물은 아니었으리라. 몸무게가 5~7t이나 나가고 키 6m, 몸길이는 무려 12~15m에 이르는 녀석이 소리를 냈다면 아마도 사냥을 마치고 헉헉거리며 먹이를 물어뜯을 때의 가쁜 숨소리, 강한 턱으로 살을 찢고 뼈를 물어 으스러뜨릴 때 나는 끔찍한 분쇄음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 째진 아가리와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아무리 보아도 서로 어울려 발음을 하고 그로써 생각을 나누게 생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비롯한 공룡들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황홀한 교미를 한 결과 새끼들을(비록 알이지만) 분만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이론이 공룡 멸종의 근거와 과정을 설명한다. 6600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분진 수백 만t이 태양을 가리자 단기간에 지구가 냉각되고 식물이 자생하지 못하게 된 결과 초식 공룡과 육식 공룡이 차례로 사라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나는 입 맞출 수도 안을 수도 없는 사랑의 불가능함, 그 서글픔 속에 멸종의 필연이 잠재했다고 믿는다. 고통조차 나눌 수 없었던 지독한 단절과 침묵의 숙명에서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 반만 년 반도의 족속을 떠올린다. 그 남북의 무리가 묵언(默言)의 빗장을 차례로 풀고 입술을 열어가는 이 장관이 그래서 나에게는 절멸의 위기를 넘어 삶으로 가는 혈로(血路)처럼 보인다. 이번엔 싱가포르, 6월12일이랬지.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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