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인간의 태아 같기도 하다. 자궁 속에 있는 태아처럼, 씨방 속에서 씨앗은 탯줄(주병)로 연결되어 있다. 씨방이 열매로 성숙한 뒤, 씨앗이 열매에서 나오게 되면 주병이 끊어지면서 씨앗에는 배꼽(제)과 같은 흔적이 남게 된다. 세상에 갓 나온 어린 새끼를 멀리 떠나보낸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당장 먹을 수 있는 도시락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어떤 보호 장치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물이 수 억 년에 걸쳐 선택한 전략이다. 그래서 씨앗은 크게 3부분-식물체로 자라게 될 부분(배), 양분을 저장하고 있는 부분(배젖), 그리고 이를 보호하고 있는 껍질(종피, 씨껍질)-로 구성되어 있다.
씨앗의 형태적 다양성만큼이나 씨를 퍼뜨리는 전략 또한 다양하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기가 씨앗단계이기 때문에 어미 식물체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멀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택하여야 한다. 자연에서는 바람이나 물을 이용해 산포되거나, 동물의 등을 타고, 혹은 동물에게 먹혀서 이동한다.
씨앗은 인간을 이용해서도 이동한다. 우연히 옷에 붙거나 혹은 운송되는 물건에 붙어서 이동되기도 하는데, 인간의 이동수단이 발달할수록 씨앗은 훨씬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적당한 장소에 도착해도 습도나 온도가 맞지 않아 발아할 조건이 되지 않으면 씨앗은 휴면에 들어간다. 때로는 몇 백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연꽃 씨앗들을 발아시켰는데, 가장 오래된 것이 1288년 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2,000년 전 대추야자 씨앗이 발아한 경우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의 씨앗이 발아하여 붉은 색의 연꽃을 피웠다는 소식이 있었다. 물론 단지 몇 종만이 이들처럼 아주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식물 씨앗은 흙속에서 몇 십 년 정도는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식물의 씨앗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여행하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 90% 이상의 식물이 이 작은 씨앗으로 번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6억 년에 걸쳐 가장 성공적인 번식전략을 거둔 것은 바로 이 작고 힘없어 보이는 씨앗일 것이다.
김지현 서대문자연사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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